'삐삐'의 추억
파이낸셜뉴스
2025.08.21 18:06
수정 : 2025.08.21 19:23기사원문
012나 015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와 유사한 삐삐 번호를 누르고 안내에 따라 받고 싶은 전화번호를 넣는다. 그러면 삐삐를 차고 있는 사람에게 숫자가 보내진다.
유명한 MC 전현무씨가 최근 삐삐와 관련된 고백을 했다. 대학에 다닐 때 미팅을 하고는 상대방에게 다음에 보자고 하고 헤어지며 삐삐 번호를 쪽지에 적어서 줬는데 가면서 쪽지 버리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삐삐는 처음에는 외근하는 영업사원들이 주로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대학생이나 일반인들까지 대부분 사용하게 됐다(동아일보 1988년 10월 28일자·사진).
전화번호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연인이나 부부끼리는 암호나 은어 같은 숫자를 보내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1004는 물론 천사를 의미한다. 486은 "사랑해" 0000은 "영원히 사랑해"라는 뜻이다. 486이 왜 사랑해일까. 글자의 꺾어지는 획의 수를 세어보면 알 수 있다. 8282는 당연히 "빨리빨리", 012는 "영원히", 1254는 "이리 오소"란 의미다. 9090은 무엇일까. "go go(가자)"라고 한다.
삐삐의 정식 명칭은 '무선호출국형선택호출수신장치'. 영어로는 페이저(pager)라고도 하고, 비퍼(beeper)라고도 하는데 beep은 '삐' 소리를 낸다는 의미다. 한국에서 통용된 '삐삐'라는 이름도 받을 때 나는 '삐삐~ 삐삐~' 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말괄량이 삐삐(Pippi)는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아동소설의 등장인물로 무선호출기와는 무관하다.
삐삐는 유대계 캐나다인인 알프레드 그로스(Alfred Gross)가 1949년에 발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부터 옛 한국이동통신 등 몇 개 기업이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초창기에는 정보기관원들이 주 고객이었다. 시범용 삐삐가 처음 소리를 울린 것은 1982년 12월 15일이라고 한다. 최초 가입자는 235명에 불과했지만, 점차 늘어 1984년 1만명을 넘어섰고 1988년에는 10만명을 돌파했다. 대입 눈치작전이 극심했던 1990년대에 삐삐는 수험생 가족이 경쟁률이 낮은 학과를 찾기 위한 통신수단으로 활용됐다. 사용자가 늘면서 삐삐의 소음이 문제가 됐다. 특히 정숙을 유지해야 할 법정이 그랬다. 사법부는 법정에서 삐삐 소리를 낼 경우 과태료 100만원을 부과하는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휴대전화 보급으로 삐삐 사용자는 점점 줄었으나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까지 스마트폰과도 시대를 함께했다. 외국에서는 여전히 삐삐가 살아 있다. 2023년 기준으로 글로벌 삐삐 시장 규모는 16억달러 수준이라고 한다. 스마트폰 시장의 1%에도 못 미치는 미미한 규모이지만, 2030년까지 연평균 5.9%의 성장이 예상될 만큼 오히려 시장이 커지고 있다. 북미와 유럽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작고 가벼워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들이 선호한다.
삐삐는 거의 사라졌지만 그 원리를 이용한 제품이 등장했는데, 음식점이나 커피점에서 쓰는 진동벨이나 호출벨이 그것이다. 진동벨은 삐삐의 후손인 셈이다. 진동벨을 최초로 개발한 리텍(Leetek)이라는 우리 기업은 원래 삐삐를 만들던 업체였다. 리텍은 국내 진동벨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50여개국으로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