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로스 시장의 상장유지 조건

파이낸셜뉴스       2025.08.25 18:24   수정 : 2025.08.25 19:11기사원문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2022년 시장 재편을 단행하며 기존의 마더스(Mothers) 시장을 폐지하고, 그로스(Growth) 시장이라는 새로운 섹션을 도입했다. 이 시장은 성장 잠재력은 높지만 아직 수익성과 재무 안정성이 부족한 기업을 위한 전용 무대로 기획되었으며, 특히 벤처·스타트업의 성장을 자본시장에서 지원하겠다는 명확한 정책 의지가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장의 '상장유지 요건'이 한국의 기술특례상장 제도와 매우 대조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그로스 시장은 상장 시에는 진입요건을 상당히 유연하게 두되 상장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강화된 유지 요건을 적용한다. 예컨대 상장 5년 후에는 시가총액이 100억엔 이상이 되어야 하며 유동주식 시총, 거래량, 주주 수, 지배구조, 공시 이행력까지 모두 평가한다. 이는 단기 재무성과가 없어도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 기반의 기업이 먼저 상장에 진입한 뒤 일정 시점 이후엔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와 투명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일종의 '성장 유예기간'을 제도화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스타트업의 실정을 정확히 반영한 설계다. 기술기반 기업, 특히 연구개발(R&D) 중심의 바이오나 딥테크 기업은 상장 당시엔 수익성이 전무하거나 시장의 검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한국의 경우 상장 전 심사에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하고, 상장 후에는 오히려 규제가 느슨해지는 구조다. 이는 오히려 기업의 장기 성장을 유도하기보다 단기 매출과 평가에 집중하게 만들어 왜곡을 초래한다.

반면 일본은 '상장 이후'에 오히려 더 많은 정보공개와 성장계획 업데이트를 요구한다.

상장기업은 매년 사업계획의 진척도와 실현 여부를 공시해야 하며, 이를 통해 투자자들과 시장은 기업의 장기 전략을 주기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 리스크, 인력 구성, 시장접근 전략 등 비재무적 요소들도 함께 검증된다. 결국 이는 기술기업이 단기 수익보다는 중장기 성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도적 시간과 압력을 함께 제공하는 효과를 낳는다.

한국의 기술특례상장은 이와 반대로, 상장 시점에 모든 검증이 끝나야만 진입을 허용한다. 상장 이후에는 사실상 규율이 약화되며, 일정 기간 기업이 공시를 유지하기만 하면 시장은 주가만으로 평가한다. 그사이 정보의 비대칭성은 커지고, 변동성은 높아지며, 개인투자자의 피해가 반복된다. 정작 기업은 기술 상용화가 완료되기도 전에 주가 하락 압력에 시달리고 R&D보다 시장 방어에 에너지를 쏟는다. 이는 기술기업에 매우 비효율적인 환경이다.

한국 자본시장 역시 그로스 시장의 철학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첫째, 상장 진입요건을 유연하게 조정하되, 상장유지 기준을 정교하게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

둘째, 상장기업의 성장계획 공시를 정례화하고, 투자자와 시장이 기업의 발전 방향과 그 실행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투명성 체계를 갖춰야 한다. 셋째, 진입보다는 유지에 집중한 심사체계로 전환해 단기적으로는 불확실성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성장과 검증이 병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벤처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신뢰다. 시간은 R&D와 시장 적응에 필요한 유예기간이고, 신뢰는 불확실성을 견디게 하는 투자 기반이다.
일본의 그로스 시장은 이 두 요소를 제도적으로 조율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균형이다. 진입의 문턱은 낮추고, 성과의 검증은 장기화하고, 투명한 소통을 통해 신뢰를 확보하는 시장. 지금 한국 자본시장이 가야 할 방향은 바로 그곳이다.

전화성 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장·씨엔티테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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