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불안 속에 생존 공간 넓히기

파이낸셜뉴스       2025.08.26 18:16   수정 : 2025.08.26 18:16기사원문

미국 특사단 대표로 방미 준비를 하던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과 몇 주 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핵심 인사들에게 어떻게 신뢰감을 주고, 감동을 줄지 고민하고 있었다. 트럼프 정부가 대중국 관계 등에서 우리에게 불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신뢰'라는 단어를 꺼내면서 "정권 바뀔 때마다 양극단으로 정책이 오간다면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꽤 오래전부터 중국 당국자들과 학자들로부터 "한국과 공조하다가 낭패 보았다"는 주장을 들어왔다. 북한의 핵개발과 도발행위 억지를 위해 한국과 공조를 강화하고, 대북 강경책을 채택하고, 유엔 대북제재안을 수용해 실천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국은 대북 유화정책으로 입장을 바꾸며 서 있는 곳이 달라져 있더라는 주장이다. 일본도 문재인 정부 때 우리를 유사한 논리로 공격했다. 위안부 합의 문제 제기에 "한국이 골대를 옮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2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국은 그 문제에 매우 집착했다"면서 "한국이 아직 위안부를 생각하고 있어서 내가 두 나라가 함께하도록 만드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일본 측 주장을 두둔하는 이 같은 발언은 국제사회에 비치는 이 문제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23일 도쿄 한일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를 미뤄두고 실용적인 협력 확대를 강조한 이재명 대통령에게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1998년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언급하며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전향적 입장으로 호응했다. 두 나라는 양자 협력을 통한 한미일 공조 강화에 방점을 뒀다. 양국 언론들은 안보질서 변화와 동맹(미국)의 압박이 한일을 협력하게 했다고 평했다. 두 나라를 다가서게 할 만큼 동북아에 불어닥친 지정학적 변화와 흔들림은 컸다.

안정적인 한일 관계의 출발 뒤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격랑 속에 들어선 우리의 처지를 보여줬다. 트럼프를 '피스메이커'로 치켜세우며 풀어낸 정상회담은 기존 합의를 원칙적으로 확인하고, 양측의 균열과 이견은 물밑으로 감추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합의서 없는 관세협정부터 3500억달러의 대미 투자 방식, 동맹의 현대화 등 정작 국익 확보를 위한 치열한 수싸움과 거래가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는 회담 직전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숙청 또는 혁명같이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고, 거기서 사업할 수 없다"고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우리를 흔들어댔다. 천문학적인 '청구서'에 회담 취소까지 다그치는 압박전술까지 이전의 '전후 80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서 있음을 보여준다. 가치동맹은 사라지고 "동맹이 적국보다 더 미국을 갈취했다"면서 거래적 관계의 계산 속에서 동맹을 닦달하는 달라진 제국. 변화의 근저에는 세계화의 희생자라는 박탈감에 가득찬 자존감 잃은 노동자 계층과 성난 백인, 앵그리 화이트들이 있다. 이들은 미국 우선주의와 고관세 부과를 지지하는 거대한 지지층을 형성하며 미국 정치의 상수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가 가도 트럼피즘은 유지될 것"이라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온다.

상대의 선의와 신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지만, 동맹과 협력국들의 호감과 신뢰 얻기가 더 절실해진 역설적인 상황이다. 중국과 전략경쟁 속에 조선, 반도체 등 제조업 부활에 목을 맨 미국에 우리는 더 많은 협력 프로젝트와 협력 공간을 제시해야 한다. 협력 면을 넓히고, 촘촘한 협력의 그물망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상호의존의 비대칭성을 완화시키며 우리의 존재감을 키우는 생존의 길이다.
근육질의 무뢰한들이 설치는 약육강식의 낯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외교적 활동 공간과 협력국들과 공통분모 찾기도 더 절실한 생존자산이 되고 있다. 이 같은 과제들을 어떻게 채워가느냐에 우리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는 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

jun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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