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벤처 種의 다양성을 키우자

파이낸셜뉴스       2025.08.26 18:18   수정 : 2025.08.26 18:27기사원문

"10년 뒤인 2035년, 매출 2조원과 영업이익 2000억원을 달성하는 회사로 끌어올리겠습니다." 지난 10년간 매출이 두배로 성장하여 올해 1조원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태경그룹 회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태경그룹은 무기화학 소재와 산업용 가스 등을 생산하는 중견기업이다.

매출 성장률이 10%에 훨씬 못 미치는 저성장 기업이지만, 회사에서는 '소재로 세상을 바꾼다'는 향후 50년의 청사진을 갖고 있다. 느리지만 크게 성장하고 오래 사는 코끼리 같은 기업이다.

한편 중소벤처 생태계에는 가젤과 같이 단기간에 고속성장하는 기업도 있다. 2012년 설립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 2014년 영어학습 앱으로 창업한 이팝소프트, 2014년 설립된 인공지능(AI) 기반 시선추적 솔루션 벤처 비주얼캠프는 대표적인 가젤형 기업으로,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아시아태평양 500대 고성장 기업에 선정되었다. 높은 기업가치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는 유니콘 벤처도 가젤형 기업에 속한다. 가젤형 기업은 성장의 속도가 빠른 대신 코끼리형 기업에 비해 오래가지 못한다. 가젤형 기업은 대부분 경쟁이 치열하고, 기술변화가 극심한 시장에서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이다.

중소벤처 생태계에 코끼리나 가젤 같은 기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과 성장 방식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기업들이 모여 상호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생태계를 이룬다. 이 중에는 일본의 모노즈쿠리 기업, 독일의 히든챔피언과 같이 장인정신과 숙련기술을 기반으로 특정 부품이나 장비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도 있다. 자전거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본 기업 시마노는 전 세계 자전거 기어·변속기 시장에서 70~80%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압도적 1위 기업이다.

장인정신과 숙련기술이 부모에게서 자식에게 전수되는 가족기업도 있다. 일본 교토의 니시키 시장 상점들, 독일 바이에른과 슈바벤 지역의 기계업체들이 그 예이다. 이탈리아의 구찌나 페라리 같은 고급 브랜드도 장인적 가족기업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세광도자기, 광주요, 삼광유리, 경주 옻칠 공방, 김해 대금 공방 등이 장수 가족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크게 성장하지는 않지만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갖고 있어 장수한다. 거북이 같은 기업이다.

물론 중소벤처 생태계에는 독자적 경쟁력을 갖추고 크게 성장하거나 장수하는 기업 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영세외식업은 토끼처럼 신생률이 높아 많이 생겨나지만, 생존율도 낮아서 기업 수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 공생 생물과 같이 다른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기업도 존재한다. 중공업, 토목건축업, 정보기술(IT) 서비스업 분야에는 하도급과 수위탁 관계에 의존하여 생존하는 중소기업이 대다수이다.

생물종의 다양성은 자연 생태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 조건이다. 중소벤처 생태계도 마찬가지이다. 조직의 정체성, 구조와 운영 방식, 외부자원 획득과 활용 방식이 다른 다양한 종의 기업군들이 각자의 활동영역을 확보하고 성장해 나갈 때 전체 생태계의 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중소벤처 정책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생태계 내 종의 다양성을 증진하는 것이다.

종의 다양성 증진을 위해서는 현재 시행 중인 중소벤처 정책에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행 벤처 확인제도는 획일적인 평가지표를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벤처 종의 다양성을 축소한다.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지원사업도 마찬가지다.
사업마다 지원 대상과 선정 평가방식을 크게 차별화해야 중소기업 종의 다양성에 도움이 된다. 모태펀드도 규모만 키우지 말고 운용방식을 다변화해야 한다. 투자금이 유니콘에만 몰리면 공멸할 수 있다.

이병헌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