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항로 시대, '길'을 넘어 '사람'을 봐야 미래가 열린다

파이낸셜뉴스       2025.09.04 14:41   수정 : 2025.09.04 15:07기사원문
이병민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최근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열리고 있는 '북극항로'는 그야말로 '기회의 바다'로 불린다. 부산-로테르담 구간은 수에즈 운하를 경유할 경우 약 1만744해리(1만9900km),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약 7667해리(1만4200km)로 약 30% 단축되며, 실제 항해에서는 10~15일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야말 프로젝트' 등 북극권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와 자원 역시 우리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원동력으로 꼽힌다.

그러나 화려한 기회의 이면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냉엄한 현실이 존재한다. 이 새로운 '길'이면에는 지구 온난화라는 냉엄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여 년간 북극의 평균 기온은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구 평균보다 4배나 빠르게 상승했으며, 지구 온난화로 북극 해빙은 10년마다 12% 이상씩 사라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후 변화를 넘어, 수천 년간 얼어붙었던 영구동토층을 녹이고 북극 생태계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원주민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재앙이다. 항로 활용 확대가 단순한 효율 논리만으로는 정당화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실제로 북극항로에서의 아시아-유럽 국제화물 실제 통과 화물량은 2024년 기준 약 300만톤 정도로, 수에즈 운하의 연간 화물 통과량 15억 톤 규모와 비교하면 아직은 계절성·특수성 물류 경로에 머무르고 있다. 더구나 제재·보험·항만 인프라 부족, 국제해사기구(IMO) 탄소 감축 규제 등은 경제성을 상쇄할 수 있는 핵심 변수로 작동한다.



문제는 북극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 기회와 위기의 불균형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최근 5년간(2020-2024) 발표된 북극 관련 해외 학술 논문 3000여편을 분석한 결과, '공동체(community)', '토착 지식(indigenous knowledge)', '회복탄력성(resilience)' 등 기후변화가 북극 원주민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이들의 적응에 대한 강조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국제 사회는 이미 북극 문제를 '사람'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국내 연구는 '북극항로', '러시아', '자원개발' 등 경제적·지정학적 관점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의 격차'는 장기적으로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당장의 경제적 이익만을 좇다가는 국제 사회에서 '기회주의적 플레이어'로 낙인찍혀 신뢰를 잃고, 지속가능한 북극 진출의 문이 오히려 좁아질 수 있다.

이제는 '사람'과 '환경'에 대한 고려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경제 활동을 위한 핵심 투자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을 중심에 둔 규범과 거버넌스를 갖출 때에만 지속가능한 경쟁우위가 보장될 것이다. 녹아내리는 영구동토층은 항만, 파이프라인 등 인프라를 붕괴시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야기할 수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원주민 사회의 불안정성은 자원 개발 프로젝트와 항로 운영에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다.

전 세계 투자 지형을 바꾸고 있는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의 관점에서도 이는 명확하다. 북극의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프로젝트에 글로벌 자본이 등을 돌리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역으로, 원주민의 전통 지식을 존중하고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지속가능한 관광 모델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북극 시대의 진정한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서는 항로 개척을 넘어 새로운 역할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제1차 극지활동 진흥 기본계획(2023-2027), UN이 지정한 2025 국제 빙하보존의 해의 흐름 속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이와 같은 국제적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책임 있는 북극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북극항로의 미래는 ‘빠른 길’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과 지역사회, 국제 규범을 존중하는 ‘사람 중심의 항로 거버넌스’를 구축할 때 비로소 열리게 된다. '길'을 넘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볼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미래의 항로가 열릴 것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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