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벨트 재앙의 징후들
파이낸셜뉴스
2025.09.10 18:27
수정 : 2025.09.10 20:37기사원문
" 세계 제조업 심장이었던 미국
호황기 이후 미래 못 본 안일함
철강 자동차 진지 몰락의 길로
여수, 포항, 울산 국내도 불안
기술 놓치고 인력수급 엇박자
뒤처진 제도론 일자리도 전멸"
애팔래치아 산맥 깊은 산골의 켄터키 남동부에서 미국 북동부 오하이오를 잇는 도로가 23번 국도다. 산골 촌놈을 뜻하는 힐빌리들을 1950년대 전후 오하이오 공업지대로 실어 날랐던 통로가 이 국도다. 켄터키 출신 컨트리 가수 드와이트 요아캄이 이 길을 소재로 가사를 쓴 곡도 있다.
"사람들은 루트 23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행복한 삶으로 데려다 줄 거라고 생각했지. 그 옛날 국도가 비참한 세상으로 이어졌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네.('Hillbilly Deluxe', 1987년)"
암코는 꼼꼼한 설계로 명성을 얻은 철강사다. 각종 강판을 주력으로 생산했으며 도로 자동차 경주용 가드레일 제품이 특히 유명했다. 할아버지의 애사심은 대단했다. 은퇴를 하고도 암코의 강철로 만들어진 자동차 브랜드와 모델을 줄줄 뀄다(힐빌리의 노래, J D 밴스). 암코에서 젊은 날을 다 보낸 밴스의 퇴직 후 삶은 나쁘지 않았다. 철강노조가 얻어낸 복지 협약 덕에 암코 주식을 갖고 있었고 수익성 좋은 연금까지 제대로 받았다. 암코는 그들을 미국 중산층으로 끌어올려 준 사다리 역할을 했다.
밴스가의 불행은 오하이오를 비롯한 오대호 일대에 구축된 세계 제조업 심장이 균열을 일으키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조짐은 할아버지의 암코 재직 말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 있었다. 전후 복구를 마친 일본과 서유럽 철강사들이 최신 설비로 생산을 늘려 넋놓고 있던 미국의 허를 찔렀다. 미국은 1950년대 전 세계 철강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점유율이 10% 아래로 급락한다.
기술격차는 1970년대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일본과 유럽은 전기로 방식의 미니밀과 연속 주조기술, 여기에 압축적인 생산 라인으로 미국보다 30% 낮은 단가가 가능해졌다. 호황에 젖어 신공법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던 미국은 1950년대식 기술과 설비 그대로였고 효율면에서 후발 주자와 비교가 안됐다. 양질의 값싼 철강이 시장에 쏟아지는데 노조는 한술 더 떴다. 1970년대 중반 체결된 철강노조협약은 철강 노동자들에게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보장했다. 그 뒤 위기가 닥치자 노조가 택한 것은 장기 파업이었다.
붕괴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암코는 말할 것도 없고 오하이오의 최대 제철소였던 영스타운의 시트앤드튜브, 철강왕 카네기가 만든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US스틸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대규모 구조조정, 공장 폐쇄로 실직자가 넘쳐났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3년 사이 피츠버그에서 10만개, 영스타운에선 5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통계가 있다. 포드, 크라이슬러, 제너럴모터스가 있었던 세계 자동차의 심장 디트로이트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이유로 몰락의 길을 갔다('미국 제조업은 왜 망했나', 신현한).
기업이 빠져나간 공장 지대는 폐허만 남았다. 세계 산업의 중심지였던 미국 북동부는 그렇게 녹슨 지대, 러스트벨트(rust belt)가 된 것이다. 밴스가 시련은 정확히 말하면 할아버지 세대 이후 사라진 일자리 때문이다. 중산층으로 오를 사다리가 끊어지고 가난과 마약, 게으름이 힐빌리들을 짓눌렀다. 힐빌리의 눈물로 집권한 트럼프 정부가 러스트벨트의 부활을 노리고 있으나 성과는 쉽지 않다.
기술 혁신의 때를 놓치고, 그 탓에 값싸고 질좋은 외국산이 들이닥치고, 회사는 문을 닫을 위기인데 기득권 양보는 거부하는 강성노조까지. 지금 우리의 산업도시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산, 여수, 포항, 울산, 거제, 광양, 군산을 보라. 여기서 성장한 우리의 석유화학, 철강, 기계, 중공업은 한때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시장도 지키기 힘든 처지다.
러스트벨트 재앙을 피하는 길은 압도적인 기술력과 고급 인재, 효율성을 극대화한 선진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아직 기술의 밑천이 거덜 난 수준은 아니고 교육열은 어느 나라보다 드높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손봐야 하는 후진적인 제도는 차고 넘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너무 늦진 않아야 한다.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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