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싸움에 뛰어든 성폭력 피해자 ‘무대 위 호소’

파이낸셜뉴스       2025.09.15 18:07   수정 : 2025.09.15 19:35기사원문

여성의 인권은 어디까지 왔는가. 여전히 세 명 중 한 명의 여성은 물리적 또는 성적 폭력과 위협을 경험한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 연합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프리마 파시'(수지 밀러 작/신유청 연출)는 셋 중 한 명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다만 연극의 주인공 테사는 교묘한 위치에 선 존재다. 그녀는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능력 있는 변호사다. 사건 이전의 테사는 직업윤리에 충실한 변호사로서, 맡은 사건 중에는 당연히 성폭력으로 기소된 남성들의 변호도 있었다. 이전의 테사는 성폭력을 신고한 여성들의 증언에서 일관성의 허점을 매섭게 찾아내 무너뜨렸다. '프리마 파시'는 사건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테사를 보여주는 1인극이다.

2019년 호주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권위 있는 여러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배우 혼자 오롯이 무대를 책임지는 1인극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관객과 '날 것의 생생한 에너지'로 대면한다. 한국의 '프리마 파시'는 김신록, 이자람, 차지연 배우가 테사를 연기한다. 김신록은 처음의 자신만만하며 확신에 찬 테사에서부터 정열적이며 적극적인 모습, 혼돈에 빠진 내면, 살기 위해 고통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테사를 시종 설득력 있고 생기 넘치게 표현한다. 공연을 통틀어 살아 있지 않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다. 통통 튀어 오르는 공처럼, 매순간 반응하며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성폭력 피해자이자 변호사인 테사의 특수한 위치로 인해 무대는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연극의 제목인 '프리마 파시'는 법률 용어로, '어떤 주장이나 사실이 추가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겉보기에 충분히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사건 이후의 테사는 기소 절차의 어려움, 범죄 사실 입증 과정의 부조리함, 제도의 불공평함을 몸으로 겪으며 고통 속에서 드러낸다. 법을 잘 아는 테사는 재판에서 패소할 것을 이미 예상했다. 하지만 침묵 대신에 관객에게 말하는 것을 택한다. "왜 지금의 법은 셋 중 한명이 겪는 경험을 담아내지 않느냐"고.

작품을 연출한 신유청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 '헌치백' '프리마 파시'에 이르기까지 논쟁적 이슈를 담은 완성도 높은 희곡을 만났을 때, 짜임새 있고 설득력 있는 무대를 연출해 왔다.
'프리마 파시'는 특히 공간과 조명 사용의 효율성을 높여 1인극의 긴장감과 템포를 유지시킨다. 또한 굉장한 감정의 파고를 겪는 테사의 심리는 배우와 지켜보는 연출에 의해 적절하게 다듬어지며 매만져졌을 것이다. 이들에 의해 균열을 일으키는 테사의 목소리는 전언이 된다.



엄현희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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