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술탄이 반드시 넘어야 했던 무역과 군사력의 경계선

파이낸셜뉴스       2025.09.16 18:19   수정 : 2025.09.16 18:23기사원문
(2) 갈라타탑과 보스포로스해협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좁은 물길 옆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길목이자
제노바 상인들이 살던 교역 중심지
비잔틴 몰락후 이스탄불 들어섰지만
그리스·유대인 등 이방인들에 개방
대사관·선박정박지 모인 항구도시로
다문화적 성격 이어오는데 큰 역할



보스포로스해협은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이 좁은 물길은 곧 제국의 생명선이자, 상인의 금맥이었으며, 군대가 반드시 지배해야 하는 전략적 길목이었다. 이 해협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오늘날 관광객들이 찾는 갈라타탑은 바로 그러한 '무역과 권력의 경계선'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1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맞은편 언덕에 자리 잡은 제노바 상인들은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갈라타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이곳은 곡물, 비단, 향신료, 그리고 노예가 오가던 유라시아 무역망의 중심이었고 따라서 철저히 '방어되어야 하는 항구'였다.

1348년 세워진 갈라타탑은 이탈리아식 석조 요새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냈다. 높이 67m의 석탑은 당시 해상에서 접근하는 선박을 감시하고, 동시에 주변의 무역활동을 장악하려는 제노바 상인들의 의지를 상징했다. 곧 갈라타탑은 단순한 망루가 아니라 무역과 군사력이 만나는 '경계의 첨탑'이었다.

1453년 오스만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을 때 갈라타지구는 독특하고도 미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제노바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들의 배와 병기, 심지어 정보까지 은밀히 양쪽을 오가며 전황에 개입했다.



메흐메트 2세는 이들의 이중적 태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갈라타를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갈라타를 공격한다는 것은 곧 서유럽 전체와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이 곧바로 국제전으로 확전될 위험을 의미했다. 젊은 술탄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로마의 심장부'였지, 상인의 거주지나 항구가 아니었다. 그는 갈라타가 불안정하게 중립을 지키는 동안 모든 힘을 성벽 너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집중했다.

특히 보스포로스해협을 지배하던 거대한 쇠사슬 방어선은 갈라타지구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연결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비잔틴은 해협 입구에 쇠사슬을 걸어 적선의 진입을 막았고, 이 쇠사슬의 한쪽 끝이 바로 갈라타탑 인근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쇠사슬은 단순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바다 위에 드리운 성벽과 같은 존재였다. 오스만의 함선들은 쇠사슬에 가로막혀 황금각(Golden Horn)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비잔틴의 해군은 그 방어선 뒤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술을 감행한다. 오스만군은 갈라타지구 북쪽의 가파른 언덕을 따라 수십척의 배를 바퀴와 통나무 굴대를 이용해 육지 위로 끌어올렸다. 불과 하루 만에 오스만의 함선들은 쇠사슬 방어선을 완전히 우회하여 갈라타 언덕 너머에서 황금각 안쪽 바다로 진격했다.



이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갈라타 주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쇠사슬은 더 이상 바다를 지켜주지 못했고, 제노바 상인들의 '중립' 역시 무력해졌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의 함대는 앞뒤에서 포위당한 처지에 놓였으며, 갈라타탑은 제국의 최후 순간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침묵의 증인'이 되었다.

보스포로스해협을 지배하기 위해 술탄은 '아나돌루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라는 대규모 성채를 해협 양편에 세워 무역선의 출입을 통제했다. 갈라타탑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서 있었으나, 더 이상 무역 독점의 상징이 아니라 곧 다가올 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는 침묵의 목격자였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의 손에 넘어가고 '이스탄불'로 새롭게 재편된 이후, 갈라타는 제국 안에서도 독특한 성격을 지닌 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오스만은 갈라타 일대를 주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럽 상인 등 이방인 집단에 개방했고 이는 곧 제국의 국제무역 창구 역할을 의미했다. 이곳에는 외국 상사의 창고, 대사관, 선박 정박지가 밀집했으며 오스만의 수도가 다문화적 성격을 띠게 된 데에는 갈라타의 존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가운데 갈라타탑은 군사적 감시소로서 새 역할을 부여받았다. 오스만은 황금각과 보스포로스해협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탑의 위치를 활용, 군사적 동향과 외국 선박의 출입을 살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탑의 역할은 단순한 군사감시를 넘어 화재감시대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이스탄불은 돌출된 언덕과 좁은 골목 사이에 목조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도시였다. 작은 불씨 하나가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었고, 실제로 대화재가 수차례 도시를 휩쓸며 수만명의 이재민을 남겼다. 이 때문에 갈라타탑에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감시병이 배치되었고 불길을 발견하면 즉시 북과 나팔, 깃발로 신호를 보냈다. 시민들은 하늘에 걸린 붉은 연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경보음을 들을 때마다 갈라타탑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임을 실감했다.

탑의 불침번은 단순히 화재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치안과 안도감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갈라타탑에서 첫 신호가 올라오면 도시 전역의 소방조직(툴룸바즈)과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때문에 갈라타탑은 오스만의 시민들에게는 언제나 '불의 파수꾼'이자 '안도의 첨탑'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탑은 단순한 화재감시대가 아니라 이스탄불이 여전히 '다문화적 교차로'임을 보여주는 장소였다. 무역로의 중심에서 제국은 늘 이방인과 거래해야 했고, 갈라타는 그러한 만남의 공간이었다.

갈라타탑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풍경은 해협의 전략적 가치와 직결되어 있다. 오스만은 해협 곳곳에 요새와 포대를 세워 외세의 접근을 막았다. 19세기까지도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이곳을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고, 20세기에는 몽트뢰 협약(1936년)이 체결되며 보스포로스해협은 '국제법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해협은 단순한 수로가 아니다. 에너지 수송로, 곡물 교역로, 군사적 억지력의 무대이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분쟁에서도 전략적 긴장이 집중되는 지점이다.
이제 갈라타탑은 더 이상 군사적 요새는 아니지만, 그 아래 흐르는 보스포로스의 물결은 여전히 '제국과 무역의 힘'을 상징하고 있다.

갈라타탑은 결국 '중립과 개입' '무역과 군사력' '개방과 통제'라는 모순된 가치가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제노바 상인의 눈에는 이익의 보루였고, 오스만 술탄의 눈에는 감시의 망루였으며, 오늘날 여행자들의 눈에는 역사의 전망대로 기억되고 있다.



양우진 한국외대 국제관계학 박사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