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기 조이며 달리라는 탄소정책

파이낸셜뉴스       2025.09.16 18:39   수정 : 2025.09.16 18:39기사원문



"플레어스택은 공장의 호흡기입니다."

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공정 안전을 위해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꽃, 플레어스택은 생산설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단전이나 사고 등 위급상황에서 배관 속 유해가스를 신속히 태우기 위해 평소에도 불을 유지한다. 말 그대로 공장이 숨 쉬는 입구다. 그런데 이 '숨'조차 줄이라는 요구가 현실이 됐다.

정유·석유화학 공장은 원료 도입부터 제품 출하까지 전 공정이 완전 밀폐형으로 운영된다. 이 안에서 플레어스택은 압력밥솥의 추처럼 공정 압력을 안정화해 대형 화재나 폭발을 막는다. 만일 가스를 별도 처리 없이 배출하면 대기오염은 물론 공장 상공에 가스층이 형성돼 화재나 폭발 위험이 커진다. 이 때문에 플레어스택은 365일, 24시간 쉼 없이 작동한다.

정부는 최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배출권거래제 제4차 계획을 발표했다. 배출 총량은 줄이고 시장안정화 물량은 확대하면서 기업들은 사전 배출권을 배정받기 어려워졌다. 여기에 플레어스택처럼 비상 안전장치에서 발생하는 배출량까지 감축 대상으로 포함되면서 산업계의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

석유화학 업계는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산업 생존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3·4분기부터 주요 나프타분해설비(NCC) 업체들이 줄줄이 적자를 냈고, 올해 상반기 누적 손실만 1조6000억원에 달한다.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1% 감소했고, 가동률은 손익분기점에 못 미치는 76% 수준이다. 국세 납부액도 2년 새 7조원 넘게 줄었다. 그렇다고 감축을 외면할 순 없다. 문제는 그 수단의 현실성이다. 정부가 제시한 제4차 할당계획에는 감축 대안이 없는 플레어스택이 포함돼 있다. 업계는 해당 시설에 한해 감축 의무에서 제외하거나 할당량을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책은 여전히 이상적인 기준을 향해 달린다. 탄소감축이라는 목표 아래 안전장치까지 줄이라는 기계적 접근은 산업의 숨통을 조일 수밖에 없다. 안전과 감축을 동시에 요구하면서도 이를 조화롭게 실현할 제도는 아직 미비하다.

탄소중립은 선택이 아닌 시대적 과제다. 그러나 이를 위한 해법이 현장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기술은 하루아침에 도입되지 않고, 산업은 사람처럼 숨 쉬며 버틴다. 공장의 플레어스택처럼 산업도 숨구멍이 필요하다. 숨을 멈춘 채 달리라는 정책이 아니라 숨 쉴 여유 속에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할 때다.

moving@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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