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찢고 싶던 그녀.. 증오를 예술로 승화한 '루이즈 부르주아'展

파이낸셜뉴스       2025.09.18 16:21   수정 : 2025.09.18 18:29기사원문



【용인(경기)=유선준 기자】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수만번 찢고 싶었다. 가부장적인 그녀의 아버지가 엄마를 학대하고, 노골적으로 외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술로 전공을 바꾼 그녀를 무시한 덕분에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갔다.

아버지는 장인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지만, 증오의 대상이 돼 두고두고 그녀의 작품 속에 나타났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그녀는 가족을 증오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기억, 사랑, 두려움, 버려짐 등 가족 내 긴장과 갈등,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내면의 균열을 잘 보여준 루이즈 부르주아의 개인전이 경기도 용인에서 최대 규모로 열린다. 호암미술관은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전을 내년 1월 4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부르주아의 작품을 한국에서 25년 만에 만나는 자리다. 회화, 조각, 설치 등 106점에 달하는 그의 작품을 한데 모아 70여년 작업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다.

부르주아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다. 가족 내 긴장과 갈등,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내면의 균열이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한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아버지와의 갈등과 애증, 어머니에 대한 질투와 연민이 흐른다. 이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단단한 재료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재료의 혼재로 발현된다. 조각과 바느질 같은 상반된 기법을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증오와 사랑, 남성과 여성 같은 이중적 충동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독특한 조형 언어를 만들어낸 게 특징이다.

부르주아의 작품에는 남녀의 신체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또한, 각각의 오브제를 조각 내고, 자르고, 이어 붙이고, 묶어놓은 작업은 어린 시절에 느꼈던 소외감, 단절감, 정체성 혼란의 두려움 속에서도 작가가 끊임없이 갈구했던 사랑의 감성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보여준다.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느낌이다.

전시 제목인 '덧없고 영원한' 역시 작가가 일생을 천착했던 야누스적 의식 구조를 나타낸다. 이는 작가가 생전에 남긴 글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기억, 트라우마, 시간, 신체 등 내면의 복잡한 지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작가의 내적 갈등을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중 구조로 풀어낸다. 1층의 밝은 공간은 이성과 질서의 세계를 보여준다. 2층의 어두운 공간은 취약함, 질투, 우울 등 무의식적 감정을 표현한다.



이번 전시는 삼성문화재단이 소장한 13점의 작품을 포함해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들도 선보인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대표작인 조각 작품 '엄마'도 설치해 눈길을 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을 담은 설치작 '아버지의 파괴'(1974),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결합한 조각 '개화하는 야누스'(1968), 어머니를 질투하는 듯한 '밀실'(2006) 연작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괴'는 붉은 조명 아래 연출된 내부를 통해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상상적 복수를 시각화했다. 단순한 파괴를 넘어 분노·동일시·치유의 욕망이 얽힌 이 작업은 부르주아 예술의 전환점이자 '밀실' 연작의 출발점이 됐다.


또 다른 대표작 '밀실'은 검은 드레스와 대리석 구체를 중심으로 질투의 심리를 형상화한 원형 구조인데, 관람객을 심리적 무대로 끌어들이는 부르주아 특유의 ‘감정의 방’인 셈이다.



이밖에 붉은 고무 침대와 눈물 모양 유리 오브제가 배치된 공간을 통해 부모와의 관계 속 긴장을 보여준 '붉은 방'(1994), 여성의 몸 위로 집이 덮여 얼굴이 사라진 형상의 '집-여자'(1946~1947), 감정의 소용돌이와 내면의 균형 욕망을 동시에 드러내는 '커플'(2003), 붉은 과슈로 번져나간 작은 꽃들을 통해 피·고통·질투 같은 격정과 동시에 생명과 치유를 담은 '꽃'(2009) 등도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25년 만에 한국을 찾은 루이즈 부르주아의 전시는 그의 초기 회화에서 말년의 섬유 작업에 이르기까지 70여년에 걸친 창작 여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흥과 깊은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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