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어쩔수가없다’ 역시 한국영화계의 자부심

파이낸셜뉴스       2025.09.23 00:05   수정 : 2025.09.24 09:33기사원문
24일 개봉, 15세 관람가



[파이낸셜뉴스] ‘사는 게 참 치사하면서도 슬프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경쟁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된 한 남자의 고군분투를 세련된 미장센과 아이러니한 유머로 풀어낸다.

가장인 남자에게 실직은 남성성과 존재가치를 잃어버리는 재앙과 같아서 경쟁자를 없애는 그 남자의 선택은 잔인하지만 인간적이다.

남자의 도덕적 타락을 포용하는 여자의 선택에선 진한 동지애와 사랑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 같기도 하다.

한 실직한 가장의 경쟁자 제거 작전


“가을이 오네.” 영화는 자신의 삶이 무척 만족스러운 25년차 특수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가 자신의 앞마당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시작된다. 닥쳐올 비극적 상황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수 없다.

일단 만수의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너른 마당에 푸른 잔디, 야외 식사가 가능한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바비큐 장비와 큰 온실이 있는, 그야말로 그림같은 집이다. 특히 고졸에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며 학위를 딴 만수는 어릴 적 추억이 서린 이 낡은 집을 사서 몇 년에 걸쳐 다듬고 가꿨다. 그런 집엔 여우처럼 예쁘고 강인한 아내 미리(손예진), 듬직한 아들, 자폐 성향이 있는 음악 천재 딸 그리고 두 마리 반려견까지 살고 있으니 누가 봐도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돌연 해고 통보가 날아든다. 명절도 아닌데 회사에서 보낸 장어 선물. 하필 그 장어가 해고의 신호였음이 드러나자 만수는 마치 목이 잘려나간 듯 충격을 받는다. 참고로 박찬욱 감독은 한때 영화 제목을 해고를 의미하는 '모가지'로 생각했다고 한다.

애교가 넘치는 말투와 태도로 늘 남편을 지지해주는 아내 미리(손예진)는 남편의 해고에 뛰어난 생활력으로 비상 대응 체계로 돌입하나 사춘기 아들과 토끼 같은 딸은 달라진 현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석 달 안에 재취업하겠다는 만수의 다짐이 1년 넘게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중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벼락 맞아 안 죽냐”는 농담에 만수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바로 제지회사의 잘나가는 반장 선출(박희순)과 지금은 자신과 같은 실직자 신세지만 잠재적 경쟁자인 범모(이성민)와 타 업종에 종사 중인 시조(차승원)을 제거하는 것.

만수의 경쟁자 제거 작전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웃픈’ 상황을 연출한다. 특히 AI와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인간 범모의 제거작전은 그의 아내 아라(염혜란)의 욕망, 비밀과 엮이면서 우당탕탕 소동극처럼 전개된다. 특히 자신의 남편을 죽이려는 만수를 의도치 않게 돕게 된 아라와 만수의 에피소드는 킥킥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다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지는 와중에 벌어지는 세 남녀의 몸싸움 신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난다.

‘엄마야 나는 왜/자꾸만 슬퍼지지/엄마야 나는 왜/갑자기 울고 싶지’라는 노래가사처럼.

사춘기 자식을 둔 시조의 제거작전은 만수 역시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점에서 컴컴한 밤바다의 거친 파도처럼 차갑고 무섭다. 마지막 선출의 제거작전에 이르면, 만수는 사기꾼처럼 능글맞고 노련해져있다.







이즈음 만수는 자신을 내내 괴롭히던 치통의 원인인 썩은 이를 마침내 뽑아버린다. 썩은 이는 단지 썩은 이가 아니다. 이는 마치 그가 도덕적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리기로 한 선언과 같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엔 평화는 과연 올까? 하늘에선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갈수록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큰 꿈인지 체감한다. 그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조금씩 버리고 시대의 요구에 부합해왔다. 그리고 AI와 로봇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그 변화의 물결이 얼마나 빠르고 클지 예측할수 없어 불안감이 커지는 게 요즘 현실이다.

'어쩔수가없다'에서도 산업현장의 로봇화로 인해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 풍경을 카메라에 포착한다.
언젠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대변하며 쓸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자본주의 풍자극에 방점을 찍는다.

15세 관람가로 폭력성은 전작들에 비하면 낮은 편이나 시체를 공처럼 돌돌 말고, 살아있는 자를 구덩이에 파묻고 잘게 간 고기를 입속에 퍼붓는 장면에선 박 감독 특유의 악취미가 묻어난다. 인장처럼.

'어쩔수가없다'는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무관에 그친 게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명불허전. 이병헌을 비롯한 손예진, 이성민, 염혜란, 박희순 등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한국영화계의 자부심'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이 잘 어우러진 수작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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