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화된 '위험의 외주화'
파이낸셜뉴스
2025.09.24 18:25
수정 : 2025.09.24 18:25기사원문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산업안전 투자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다. '위험의 외주화' 현상은 더 이상 낯선 용어가 아니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안전에 대한 투자와 대응에 관한 담론들이 쏟아졌지만 그때뿐이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고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까지 안전을 비용절감으로 간주하며 위험의 외주화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GDP 대비 산업안전 예산 비율은 0.1% 미만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대비 산재 사망률은 2~3배 이상으로 높다. 위험관리에 대한 투자와 대비를 소홀히 한 결과다. 하청·외주 구조가 고착화되고 원청 책임 강화는 더딘 편이다.
이처럼 위험노동을 줄이는 구조적 개편 없이는 GDP가 높아도 사회적 신뢰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산업안전은 복지와 연결된 문제로 단순히 비용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한국은 1인당 GDP 3만~4만달러의 고소득 국가이지만 산업재해율은 OECD 평균보다 높고, 감소 속도도 느리다. 국회미래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일수록 신체적·정신적 위험과 실업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들이 주로 위험한 일자리에 몰리는 구조가 형성된다고 분석했다.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은 "위험은 계급적으로 분배된다"고 했다. 위험은 모두에게 존재하지만 누가 더 많이, 더 자주, 더 심각하게 겪는가는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위험한 일은 하청·비정규직·이주노동자에게 집중되고, 원청은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특히 위험을 줄이는 정책이 중산층 이상에 더 유리하게 설계된 것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벡이 말한 '위험의 구조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회 중 하나다.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상 속에 침투한다. 우리가 마시는 물, 숨 쉬는 공기, 먹는 음식 속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존재한다. 특히 환경오염은 가난한 지역과 국가에 더 집중되며, 위험이 국가 간에도 수출된다.
"지금 한국은 수위가 서서히 높아져 물이 넘치기 직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산업재해 문제를 단순한 사고가 아닌 구조적 위기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원청의 책임회피 구조를 바꿔야 하지만 쉽지 않다. 위험의 외주화는 단순한 비용절감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거래하는 구조다. "산업안전에 쓰는 돈은 비용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 보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는 지적은 그저 전시용에 불과하다. 단기적으로는 외주화가 저렴해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고로 인한 손실과 사회적 비용이 훨씬 크다.
한 전문가는 이런 현상을 보며 "안전불감증이란 말은 쓰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지적한다. 한국은 자연재해에서 세계적으로 안전한 국가에 속하지만 인위적 재해가 너무 잦다. 원인은 대기업이 제공하고 부담은 국민과 하청업체가 떠안으며 겉으로 두루뭉술하게 '안전불감증'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그만큼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정부가 나서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을 하니 기업이 산재 예방에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계급적으로 분배된 위험을 해소하려면, 정책의 설계와 실행 과정에서 취약계층의 목소리와 참여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험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나 운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불평등이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정책은 단지 기술적 해결이 아니라 정의와 권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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