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주기식 대미 투자, 어쩔 수가 없다?

파이낸셜뉴스       2025.09.30 18:10   수정 : 2025.09.30 18:10기사원문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에서 25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해고된 주인공은 재취업을 위해 입사 경쟁자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는 이유로 살인마저 허락하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내린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 한마디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 영화에서 최근 미국의 관세압박 행태가 오버랩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미국의 고관세 압박과 대미투자 요구에 '대략 난감'이다. 나라가 거덜 날 만한 투자를 압박받는데도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 한마디 못한다. 강자 앞에서 어쩔 수가 없으니까. 더욱 당혹스러운 건 동맹국의 억울한 심정과 달리 미국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강변하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전쟁에 열을 올릴 때 "적국보다 동맹국들이 미국을 더 뜯어먹었다(ripped off)"라는 거친 언사를 날렸다. 침몰하는 미국 재건을 위해 이제는 동맹국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목적과 동기가 담겼다. 미국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 변명이다. 아무리 미국의 내심이 그렇더라도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한다. 미국이 내민 후불청구서의 근거와 액수가 정확해야 되지 않는가.

미국의 경제위기는 자초한 면이 많다. 제조업 공동화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저비용 생산과 해외시장 공략을 위해 자국 내 공장을 해외로 옮겼다. 다국적 기업으로 세계의 생산과 소비 시장을 장악하려던 구상에서다. 한국 등 동맹국들은 분업을 통해 미국 중심의 산업구조를 떠받쳤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동맹국들에 제조업을 뺏겼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미국을 위협하는 중국의 부상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키는 데 앞장선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미국 주도의 무역질서를 만들려던 의도와 달리 중국이 너무 커버렸다. 미국 내부의 구조적 모순도 경쟁력을 스스로 깎아내렸다. 주주자본주의가 단기 주가상승만을 추구하며 실물경제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급기야 금융 기득권이 몰린 월스트리트와 제조업 기반의 러스트벨트 간 격차는 미국 내 불평등 문제를 촉발했다.

결과적으로 미국도 동맹국도 같이 잘 먹고 잘살자고 짰던 계획들이 미국 뜻대로 안 풀린 게 화근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태도는 동맹국들 입장에선 납득이 안 간다. 동맹국이 선불로 천문학적 액수를 내놓고 미국은 자금 운용과 이익 배분을 결정하는 것을 '투자'라고 부르란다. 그러나 동맹국이 '뜯어먹었다'는 미국의 내적 동기가 진심이라면, 이건 '투자'의 얼굴을 한 '배상'의 성격이 짙다.

미국과 동맹국 간 투자합의서를 놓고 동상이몽을 하는 건 바로 이런 인식 차에서 비롯된다. 백번을 양보해 미국이 바라는 대로 동맹국들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준다고 치자. 그러면 해가 지지 않는 미국의 번영은 실현될까? 더불어 동맹국들도 미국 번영의 낙수효과를 누릴 수 있을까.

미국이 수십년간 세계 패권을 쥘 수 있었던 토양은 신뢰 자본과 혁신에 있다. 각국의 이민자들을 하나로 모은 '신뢰'를 쌓은 게 자유로운 거래의 토대가 됐고,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경쟁자를 앞서갔다. 위대한 미국은 이렇게 완성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재건하는 작업도 신뢰자본과 혁신에 바탕을 두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의 최근 행보는 역선택에 가깝다. 한번 균열된 신뢰자본을 되찾으려면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하며, 남의 돈에 의지해 재기하려는 순간 혁신의 자생력은 소멸하고 만다.


하늘에서 떨어진 돈으로 미국이 당장 달콤한 과실을 맛보더라도 동맹국이 무너지면 '마가'는커녕 모두의 파국만 자초할 뿐이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공멸의 길이 아니라 '어찌할 수 있는' 상생을 만들어갈 때다. 지금이 그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jjack3@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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