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죄가 없다
파이낸셜뉴스
2025.10.01 18:10
수정 : 2025.10.02 07:56기사원문
뇌물로 의심되는 이우환 그림
김 여사 오빠 장모 집에서 발견
진짜냐 가짜냐 논란에 휩싸여
2016년에도 위작 시비로 홍역
뇌물은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
국가·기업 운명 뒤바뀔 수 있어
요즘 그림 한 점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우환 화백(89)의 1970~80년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점으로부터 No. 800298(From Point No. 800298)'이다. 가로세로 33×24㎝의 이 작은 그림이 지난 7월 김건희 여사의 오빠 김모씨의 장모 집에서 발견되면서 미술계가 시끄럽다.
최초 발견 당시 김건희 특검은 이 작품이 김 여사 측에 전달된 뇌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림이 나온 장롱에서 김 여사가 과거 해외순방 당시 착용했던 목걸이 등 고가의 귀금속이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한데 이 그림을 둘러싼 공방이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9월 초 김건희 특검이 이 작품을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감정 의뢰한 결과 '위작'이라는 판정 결과가 나오면서다. 감정위는 이 작품의 유통경로, 서명, 재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가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특히 대만 군소 경매에 처음 나왔을 때 400만원 안팎에 불과했던 작품값이 비상식적인 변동폭을 보이면서 1억원 넘게 거래된 점을 가장 의심스럽게 봤다. 또 화면 우측 하단에 누런색 필치로 'L. UFAN 80'이라고 세필로 서명한 부분의 글씨체나 안료가 이우환 작가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주장을 내놨다.
이는 이 그림이 처음 발견됐을 당시 함께 있었던 한국미술품감정센터의 진품 감정서와는 전면 배치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한쪽에서는 진짜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짜라고 하니 시쳇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이 1억여원에 거래될 당시 진품 감정서를 써준 한국미술품감정센터는 이번에 특검으로부터 재감정 의뢰를 받고도 역시 진품 소견서를 제출했다. 한국미술품감정센터는 "2022년 대만 경매사가 작품의 가치를 잘 모르고 헐값에 출품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중간상을 여러 번 거치면서 작품값이 크게 오른 것이 위작의 결정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우환 작품에 대한 위작 시비가 불거진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6년에도 이번에 논란이 된 '점으로부터' 시리즈를 비롯해 '선으로부터', '다이얼로그' 연작 등 총 13점의 작품이 위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미술계가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당시 경찰은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No. 780217' 등에 첨부된 감정서의 접수번호가 실제 작품과 다른 작가 명의였다는 정황을 잡고 화랑주 등을 소환 조사한 뒤 최종적으로 위작 판정을 내렸다. 한데 정작 작가 자신은 위작 시비에 휩싸인 작품을 두고 "모두 내 호흡과 필치가 묻어 있는 진작"이라고 주장해 미술계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당시 해프닝으로 끝난 위작 시비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자 업계 관계자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우환의 그림이 진품이든 가품이든 이번 작품이 뇌물로 건네진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특검이 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자 김 전 검사 측은 '작품의 가치가 낮게 평가될 경우 구속의 필요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패 문제에 정통한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클릿가드는 뇌물을 '자신의 필요를 가장 편한 방법으로 얻으려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역사적으로도 뇌물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범죄이자 가장 광범위한 일탈행위로 기록되고 있다. 지난 2015년 국내 출간돼 화제를 모았던 '뇌물의 역사'의 저자들은 정책결정 과정에 뇌물이 오가면 국가의 운명이 바뀌고, 기업의 순위가 바뀌고, 대형 사고가 발생해 국민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세상을 움직여온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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