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외교 무대서 韓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로 거듭날 기회"

파이낸셜뉴스       2025.10.01 18:14   수정 : 2025.10.02 10:20기사원문
김현욱 세종연구소장에게 듣는 ‘한달 앞둔 APEC과 한국 외교’
美·中 패권국 역할 못하는 상황 속 ‘주최국’ 韓, 어젠다 제시해야
한중 관계 재정립 필요…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 역할도 강화
한미관계도 장기적으로 봐야… 트럼프 마지막 美대통령 아냐
日·유럽 자강 노력 중… 자체 핵무장 준비 필요하나 당장은 아냐
국가 ‘전략적 자율성’ 키워 국익 기반한 관계 창출 고민할 때

국내외 정세가 어지럽다. 북한은 핵무장을 강화하며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패권 다툼을 계속하며 우방국을 따지지 않고 관세로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담은 우리의 외교지평을 널리 알릴 기회로 기대를 모은다. 통일, 외교, 안보 분야에서 국내 최고 민간 싱크탱크의 하나인 세종연구소 김현욱 소장을 만나 이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단계적 비핵화 등 이재명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 대한 견해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은 화해, 협력,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하노이 (북미회담) 실패 이후 북한은 한국에 대한 불신이 강해졌고, 완전히 핵개발 쪽으로 기울었다. 북한과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고, 결국은 한미 간의 협의나 조정을 통해서 우리 입장을 관철해야 할 상황인 것 같다. 비핵화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북미 간에 합의점을 찾는 것은 트럼프 정부에도 큰 딜레마고 숙제다. 아마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내놓은 게 북한 비핵화 3단계론인 것 같다. 비핵화라는 목표가 있지만 현 단계에서 중단과 축소라는 두 단계를 통해서 북한과의 합의를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 등으로 경제지원과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얻어냈고, 이에 반해 한미일 3국은 비핵화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중간 단계를 제시한 것으로 본다. 북미 협상이 (열린다면) 성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미측에 '인풋'을 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현실적인 방안이 아닌가 한다.

―북한은 우리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데, 우리는 '페이스메이커'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게 현실이다. 아마 정부도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아무리 대북 유화 메시지를 던져도 북한이 받아주지 않기에 한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결국은 트럼프 정부에 우리 목소리를 잘 전달하는 게 숙제로 보인다. 예를 들어 트럼프(대통령)와 김정은(국무위원장)이 만났을 때 미국이 북한에 제시할 구체적 어젠다를 준비해 미측에 전달해야 한다.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고 트럼프가 관심을 가질 어젠다로 생각할 수 있는 건 광물협약 같은 것이다. 북한이 중국 다음으로 많은 매장량을 가진 희토류 개발이 예다.

―이달 말 열리는 APEC 회담을 어떻게 외교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다자 외교에서 한국이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로 거듭날 중요한 기회다. 첫째, 트럼프 정부가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펴면서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공공재를 제공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다. 이번에 중국이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원조액으로 제시한 금액이 향후 3년 간 120억위안 정도다. 중국 경제도 부채가 많고 소비가 잘 안 된다. 유럽과 미국 시장 수출이 막혀 있고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글로벌 사우스' 시장 규모는 미미하다. 미국, 중국이 모두 패권국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자 외교가 매우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한국이 APEC에서 주도권을 갖고 어젠다를 제시하는 무대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둘째, 한중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1990년대, 2000년대에 중국에 기대했던 건 북한 비핵화를 위해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미 핵을 가졌기에 얻을 게 없다. 중국이 한국에 어떤 전략적 이익이 되는가를 고민하여 새롭게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셋째, APEC에 유럽 국가들도 많이 오는데 그들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 그들과의 관계도 돈독히 하고 한편으로는 G7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또한 미국의 역할이 약해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이 주도적인 플레이어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번 APEC에서 한미일 협력 관계를 다질 필요는.

▲실용외교는 어느 한 진영에 몰입되지 않고 국익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미일 3국 간에도 충분히 논의할 부분이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대만 사태 등에 대비하기 위해 소다자적으로 한국, 일본, 호주, 필리핀 등의 역할을 원한다.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한국의 국익에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은 한미일 3국이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한미 간에 갈등이 계속되는데.

▲미국과 우방국, 동맹국들이 냉전시대부터 쌓아온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트럼프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까. 자유주의 국제질서 마이너스 미국, 이것이 현재 매우 중요한 화두다. 트럼프 이후에도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미국, 아시아, 유럽 국가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다. 우리는 트럼프와 손해 볼 딜(거래)을 할 필요는 없다. 미국에 3500억달러를 직접 투자하면 금융위기가 올 수도 있는데 쉽게 해줄 상황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트럼프 때문에 한미 관계를 깨면 안 된다. 트럼프가 마지막 미국 대통령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백악관은 완전히 '마가'(다시 미국을 위대하게)가 점령했고, 트럼프 1인이 정책 결정을 다 하기 때문에 미국의 외교안보정책 시스템이 붕괴됐다. 이민비자 문제도 그러한 민낯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한다.

―미국에 국가들이 연합해서 대항할 수는 없나.

▲현 상황은 집단행동(collective action) 모델을 잘 보여준다. 즉, 트럼프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나머지 국가들이 집단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국가가 부담이 크니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 무임승차(free riding)를 하려는 거다. 미국을 대체할 국가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의미다. 미국의 파트너 국가들은 아직도 트럼프 이후에 미국의 패권국 지위가 유지될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 같다. 미국의 패권력을 과연 중국이 대체할 수 있을까. '피크 차이나'는 이미 진행형이다. 내수가 안 되고 수출이 막히니 기술굴기가 경제로 전이되지 못하고 있다. 미중 간 국내총생산(GDP) 차이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전략은 계속 기술투자를 하면서 미국의 동맹·우방국이 아닌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하는 거다. 또한 미국의 동맹국들 중에서 좀 관계가 약한 국가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을 포섭하려 한다. 미국은 동맹국들의 공장을 (미국 내에) 짓게 하고 있고, 또 자체 성장을 추진하고 있는데 다시 중국과 경쟁할 수준이 되는 데 7~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 승자가 된다고 가정하면 한국 첨단산업의 경쟁력이 완전히 중국에 잠식당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미래에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해야 한다.

―북핵에 대응하는 자체 핵무장론이 분출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핵을 가져야 되지 않겠나.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이고. 중국의 해양세력 확대가 서해까지 올 만큼 중국의 도전이나 위협도 가시화되고 있고, 대만 사태가 났을 경우 한국도 얽히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패권력은 계속 약화될 수밖에 없고, 앞으로 어느 순간에는 핵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당장은 아니다. 당연히 미국의 반대가 거셀 거다. 한국이 핵을 가졌을 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인 핵확산금지조약(NPT) 레짐(체제)이 타격을 입는다. 한국이 핵을 가지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대비는 해놓을 필요가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일본이나 유럽의 정책은 자강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거다. 한국도 그렇게 해야 하고, 언젠가 핵을 가져야 될 순간이 왔을 때 빠르게 추진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여러 제약이 있잖나. NPT 말고도 한미 원자력협정도 있고.

▲핵 물질을 처리하면서 상업적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계속 미국에 전달해야 된다. 원자력협정 개정이 핵개발로 이어진다는 논리는 자제해야 한다. 탐지위성이 도처에 깔려 있는데 핵개발이 가능하겠는가. 국제사회가 조기에 알게 되고 경제제재로 이어질 것이다. 핵개발 잠재력을 위해 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된다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 동북아에서 핵 위기는 고조되기 시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 사용 발언을 했을 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다. 결국은 재래식 무기 대응을 결정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만약 대만해협에서 중국이 핵을 사용하면 일본은 거리가 100㎞ 남짓밖에 안 된다. 미국이 전략 핵 미사일을 쏠까. 쉽지 않다. 미중 간 전략핵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국은 핵 보유보다는 미국의 핵우산 강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의 자율성을 키워야 하지 않나.

▲지금 유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개념화되고 있는 게 전략적 자율성이다. 독일은 러시아 가스에 의존했으나 전략적 자율성을 위해 많이 줄였다. 나토 핵심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에 대한 의존도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략적 자율성을 키워 나갈 고민을 해야 한다. 첫째는 중국에 대한 전략적 자율성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북핵 문제도 그렇고 중국한테 얻을 게 없다. 이제 경쟁관계다. 교역량은 여전히 많지만 적자국이 됐다. 어떻게 우리의 이익에 기반한 관계를 창출할지 고민해야 한다. 한중잠정조치수역에서 인공 구조물을 짓고 있는데 강대국이라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대미 관계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정부에서 전방위적으로 힘든 상황으로 몰리고 있지 않나. 우리가 동맹국이지만 미국에 대해 얼마만큼의 외교 공간과 이익 공간을 지키고 창출할 것인지가 외교적 과제다.

―최근의 북중러 결집은 어떻게 보나.

▲중국은 중국 중심으로 이만큼 진영이 갖춰져 있다는 걸 보여주고, 미국의 대중국 압박을 완화시키려 한다. 북러 동맹과 북미회담 가능성에 대한 경계도 있다고 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가는 상황이니까 중국에 지원을 원한다. 북한이 가장 큰 수혜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북러 관계가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다시 중국에 접근하는 것이다. 중국은 경제원조를 약속해줬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줬다. 3국이 각기 이해관계가 다른데 얼마나 오래갈까. 서방 국가들과 같은 결속의 지속력은 없을 것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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