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입'에 먹힌 재정적자

파이낸셜뉴스       2025.10.02 18:02   수정 : 2025.10.02 18:02기사원문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5월 의회에서 "일본 재정상황이 그리스보다 나쁘다"고 했다. 나랏빚 규모가 워낙 큰 데다 금리가 오르면서 국채 이자부담이 급증하고 있어서다. 비슷한 시기, 이재명 대통령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씨앗을 빌려서라도 농사를 준비하는 게 순리"라고 했다. 두 정상의 상반된 발언, 우리는 일본과 경제 규모와 처지가 다르고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일본의 재정적자는 세계 최고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비율은 236.7%(2024년 말 기준). 국가부채는 1130조엔(1경760조원)으로 한국(1300조원)의 9배, 부채비율(49%)은 4배다.

일본의 재정적자가 급격히 불어난 때는 '잃어버린 30년' 기간. 1993년 이전까지는 GDP 대비 부채비율이 60% 정도였다. 거품이 붕괴되고 재정운영 실패가 더해져 1998년 GDP의 100%를 넘어선다. 이후 10년 새 50%p 정도 미친 듯이 불어나더니, 코로나 팬데믹을 거쳐 250%까지 치솟았다. 구멍 난 재정을 건설공채나 적자보전국채를 찍어 충당했다.

30여년 재정·경제 정책을 해 온 안일환(기획재정부 전 차관)은 최근 펴낸 '국가채무와 경제위기'에서 일본이 정부 지출과 수입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이른바 '악어의 입' 현상에 빠진 배경을 설명하는데, 우리의 처지와 너무 닮아 섬뜩할 정도다. 요약하면 일본은 ①경제성장률 하락(1990~2010년 연평균 -0.8% 디플레이션) ②구조개혁과 감세정책 실패(1990년부터 20년간 조세수입 15조엔 급감)로 재정수입이 계속 줄었다. 반면 ①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사회복지지출 증가(GDP 대비 20% 이상) ②비효율적 공공지출 증가(수요보다 정치적 투자사업)로 재정지출은 크게 늘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의 재정적자 급증 패턴을 우리가 거의 동일하게 밟고 있다는 것이다. 경쟁국에 추격당한 주력산업 침체→경제성장률 하락→저출생 고령화→사회보장비용 급증→장기침체로 법인세 등 주요 세입 감소→적자국채 발행 급증→금리 상승→이자부담 가중→재정지출 압박의 악순환이다.

우리는 어떤가. 세입이 줄어 부족한 재정을 내년에 230조원(차환용 120조원)의 국채를 찍어 조달한다. 역대 최대다. 맡겨놓은 돈인 양 "선불"로 내라는 3500억달러 대미 투자금도 상당액을 국채로 조달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정부 임기 내 매년 적자국채 발행 최대 기록을 경신, 2030년 국가채무는 GDP 대비 60%선을 넘을 것이다. 채권 발행이 늘면 금리는 오르고 이자부담은 더 늘어난다. 내년 국채 이자만 36조원, 이재명 정부 5년 내 50조원에 육박할 것이다.

경제가 꾸준히 성장만 하면야 재정적자가 늘어도 걱정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첨단 제조업 장악과 한국의 입지 위축, 급격한 대미 투자에 따른 국내 제조업 공동화, 초고령화와 생산인구 감소, 늘어만 가는 노인·아동 수당과 같은 현금지출 복지비용. 이것을 인구가 줄어든 미래 세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씨앗을 빌려와서라도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이재명의 '씨앗론'에 동의한다. 인공지능(AI) 대전환, 초혁신 기술 투자도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13조원 소비쿠폰과 같은 현금살포 정책은 재정의 질을 나쁘게 만든다. 소비쿠폰의 단맛은 짧다. 명명백백 확장재정은 약속한 대로 신성장 투자와 구조개혁에 쓰여야 한다.


그러나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포퓰리즘 공약, 타당성 검토 없이 허투루 쓰이는 예산에 재정당국이 침묵하지 않을까, 신성장 투자와 구조개혁에 쓰여야 할 재정이 흐지부지돼 껍데기만 남지 않을까, 증세는 말도 못 꺼내고 줄이기 어려운 복지지출만 늘어 '악어의 입'이 더 크게 벌어질까 걱정스럽다.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 어느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재정상황이 일본보다 더 나쁩니다."

skjung@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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