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원자력협정 재협상 검토…"기술 자립과 동맹 재조정 시험대"
파이낸셜뉴스
2025.11.08 06:00
수정 : 2025.11.08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미 원자력협정(일명 123협정)의 재협상 가능성이 공론화되고 있다. 1974년 최초 체결 이후 2015년 개정된 현재의 협정은 2041년까지 유효하다. 하지만 한국의 원전 수출 확대, 사용후핵연료 저장 포화 문제가 동시에 현실화되면서 협정의 제약이 산업 전략과 국익을 구속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차세대 원전으로 꼽히는 소형모듈원전(SMR) 시장에서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협정 체계 조정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다만 미국이 핵비확산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어 협상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핵무기 개발 우려에 발목잡힌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한미 원자력협정의 핵심 쟁점은 한국이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느냐에 있다. 현재 협정은 한국이 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미국은 이 과정을 ‘핵무기 전용 가능성’과 직결되는 민감 기술로 보고 철저히 통제해왔다. 문제는 한국 내 원전에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가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문제는 국내 원전 부지의 사용후핵연료 저장 용량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다. 고리·한빛 등 주요 원전은 2030년대 중반부터 저장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대체 저장시설 건설은 지역 주민 수용성 논란과 안전성 논쟁으로 난관에 부딪혀 있다.
이재명 정부는 후보 시절 ‘파이로프로세싱과 고속로 연계를 포함한 다단계 처리 기술 검토’를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파이로프로세싱 역시 미국이 사실상 재처리 기술로 인식하고 있어 상업적 적용에는 제약이 따른다.
정부 관계자는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며 “협정에 대한 해석 확대나 단계적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결국 한국은 기술 능력이 있음에도, 미국의 승인 없이는 실질적 처분·활용 정책을 자유롭게 펼 수 없는 구조에 놓여있다.
원전 수출 승인권…산업 주권 논쟁으로 확산
한국형 원전(APR1400)은 국내에서 설계 고도화와 안전성 개선을 통해 성능을 확보했지만, 초기 원전 기술의 기원과 설계 체계가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가압경수로(PWR) 계열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원전 수출이 제3국을 대상으로 할 경우, 기술 이전·수출 허가에 대한 사전 동의 권한(Consent Right) 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해석해 왔다.
이는 한미 원자력협정 7조(핵물질·기술의 재이전 제한) 조항에 근거한다. 한국이 원전을 수출하더라도, 원자로 설계 일부 요소가 미국 기술 계열에 속한다면 미국의 승인 절차가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지난 2010년 2010년 한국이 아랍에미리트(UAE)에 바라카 원전을 수출했을 때도, 원자로 설계, 핵연료 사용 및 운용 규범, 미국 기술 소요 범위 확인 등과 관련해 미국 정부 및 기업의 공식 승인 절차가 선행됐다. 당시 승인 절차는 조용히 처리됐지만, 산업계에서는 한국 원전 수출의 제도적 한계가 드러난 첫 사례로 평가한다.
특히지난 2022~2023년 웨스팅하우스는 "한국형 원전 설계는 미국 기술을 기반했으므로 미국의 허가 없이 수출할 수 없다"며 한수원을 상대로 국제 소송을 제기했다. 국제중재 판정에서 웨스팅하우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체코, 폴란드 등 주요 수출 대상국 협상 과정에서 이러한 승인 절차가 사업 속도와 협상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재명 정부는 원전 수출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재정비할 계획이다. 산업부는 원전 수출 지원 전담 조직 확대와 금융 패키지 확대를 검토 중이다. 그러나 수출 과정에서 미국의 승인 절차가 발목을 잡을 경우, 한국의 원전 외교는 일정 부분 미국 대외정책에 종속된 것이 굳어지게 된다.
한미원자력협정, SMR 시장 진입의 열쇠
SMR은 모듈 형태로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대형 원전 대비 건설 기간과 비용이 낮고 안전성이 높아 차세대 원전 시장으로 꼽힌다. 세계 시장 규모는 2035년까지 약 550조~800조원으로 전망된다. SMR은 기존 대형 원전과 동일한 저농축 우라늄(LEU)을 연료로 사용하지만, 일부 차세대 SMR은 고농축 우라늄(HALEU) 또는 특수 가공 연료를 사용한다. 이 연료는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SMR을 해외에 수출하거나 상용 플랜트를 운영하려면 연료 공급 계약 단계에서부터 미국의 사전동의가 필요한 구조가 된다. 이는 설계를 한국이 하더라도 연료가 미국에 묶이면 사업 주도권은 미국이 가진다는 의미다.
또 SMR에도 △재처리(플루토늄 분리) 금지 △중장기 저장 외 처리 방식 선택 폭 제한이라는 현행 한미 원자력협정이 내용이 그대로 적용된다.
SMR은 ‘경량·친환경·도시형 에너지 시스템’을 표방하지만, 운영이 확대될수록 사용후핵연료가 결국 대규모로 누적된다. SMR 확대가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누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부담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SMR 상용화를 위해서는 재처리 연구 범위 확대 또는 중장기 연료 관리 해법 확보가 필수이며, 이는 한미 원자력협정 조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또 미국은 원자력규제위원회(NRC)를 중심으로 SMR 안전·설계 국제 표준을 사실상 선점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 한국은 자체 모델을 개발하더라도 미국 규제·인증 체계를 거치지 않으면 시장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한미 원자력협정 재협상, 웨스팅하우스 동의권 조정, SMR 국제 표준 경쟁은 동시에 풀어야 할 한 묶음의 전략 문제"라며 "단순히 원전 산업의 이해관계를 넘어 한국의 중장기 외교·산업·에너지 체제의 구조를 결정하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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