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m 거리, 600년의 고민

파이낸셜뉴스       2025.11.10 18:58   수정 : 2025.11.10 18:58기사원문

서울에 살아도 종묘를 가본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수년 전 종묘를 가본 적 있다. 마치 그곳에서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함이 느껴지는데,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 종묘가 요즘 다시 도마에 올랐다. 서울시가 세운지구 재정비계획을 변경했는데, 이를 놓고 국가유산청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종묘의 경관과 문화유산적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며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오래되고도 오래된 해묵은 논쟁이 20년 넘게 이어지더니 아직도 질긴 악연의 끈을 끊지 못한 모양이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는 고층 빌딩 사이 낡은 저층 건물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2000년대 들어 상권으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어가면서 낙후돼 왔다. 이 중 세계문화유산 종묘의 바로 앞마당인 세운 4구역은 공사가 멈춰 수년째 흙먼지만 날리는 빈땅으로 방치 중이다.

서울시가 세운 4구역에 141m 건물을 짓겠다고 발표했을 때 문화재 훼손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나는 처음엔 그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600년 역사 앞에서 높은 건물을 세운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니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세운 4구역과 종묘 사이는 180m다. 서울시 조례상 문화재 보호구역은 100m 이내다. 대법원도 이 거리에서의 개발을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누군가는 '자로 재서 180m니까 괜찮다'는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이냐고 비판할 수 있다. 179m였으면 어떻고, 181m는 또 다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이라는 것은 이런 갈등이 생길 때 판단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기준이 없다면 어디까지를 보호해야 할지 누가 결정하겠는가. 칼 같은 기준 나누기가 불편하다면 종묘 주변은 모두 개발 불가지역이 돼야 한다.

프라하, 파리, 런던 등은 모두 역사적 정취를 한가득 품은 도시다. 그들도 전통을 보존하면서 도시 경쟁력을 위해 역사지구와 현대지구를 적절히 분리해 개발했다. 세운 4구역 역시 종묘에서 180m 떨어져 있다. 완충지대가 있는 셈이다. '녹지축 조성'도 수긍할 만한 계획이다. 남산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녹색 통로를 만들어 도시를 한 뼘이라도 숨 쉬게 만들려는 시도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주택이다. 젊은 세대는 집을 사기는커녕 전세조차 구하기 어려워졌다. '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은 아름답지만, 그 명분 때문에 청년들이 서울을 떠나야 한다면 그것도 비극이다.

세운상가 자체가 1960년대 지어진 거대한 구조물이다. 지금도 종묘는 현대 건축물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종묘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 주변을 방치해왔다. 낡고 위험한 건물, 무질서한 간판, 전선이 뒤엉킨 골목. 그것이 과연 세계유산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일까. 오히려 주변을 정비하고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종묘의 품격을 높이는 일일 수도 있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앞 유리 피라미드는 처음 지어질 때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지만, 지금은 파리의 명물이 됐다. 현대와 역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증거다.

세운 4구역 개발이 완벽한 해법은 아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0년 넘게 방치된 낙후지역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종묘를 지키는 것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 이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적 반대나 맹목적인 찬성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역사와 현대가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지혜다.


180m. 그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도, 가깝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그 공간을 어떻게 채우느냐다. 그 곁에 서는 건물이 종묘를 가리는 벽이 될지, 아니면 종묘로 향하는 통로가 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ahnma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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