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엔 완성이 없다” 이순재 별세, 연기 인생 69년..향년 91세
파이낸셜뉴스
2025.11.25 10:09
수정 : 2025.11.25 10:43기사원문
25일 새벽 별세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약해온 이순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25일 유족에 따르면 그는 이날 새벽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2024), KBS 2TV 드라마 ‘개소리’(2024) 등에 출연하며 영화·방송·무대를 넘나들었다.
1990년대에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대발이 아버지’ 캐릭터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한 ‘야동 순재’로 변신해 어린 팬들까지 끌어모았다. 이어 예능에서 보여준 거침없는 열정으로 ‘직진 순재’라는 새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연극 무대로 돌아와 구순에 이르기까지 무대 위를 지킨 그는 끝내 연기 도전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이순재는 삶과 연기에 대한 철학을 담은 말들로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그는 “나이 들었다고 주저앉아 어른 행세를 하거나 대우만 받으려 한다면 이미 늙은 것이다. 나는 ‘한다’고 마음먹으면 지금도 할 수 있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연기에 대한 태도 역시 매우 엄격했다. 그는 “연기를 쉽게 생각했던 배우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만했던 수많은 배우들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사라졌다”며 “배우는 늘 새로운 작업에 도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만이 남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연기에는 완성이 없다. 완벽할 순 없어도,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며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해 연기자로서의 소명을 드러냈다.
대학 시절 영화 '햄릿' 보고 연기자의 길로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네 살 무렵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호적에는 1935년생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해방을 맞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연기에 눈뜬 시기는 대학 시절로,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 로런스 올리비에 주연의 영화 ‘햄릿’을 본 뒤 배우의 길을 결심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그는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로 발탁되며 한국 방송사와 함께 걸어왔다.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출연작만 140편이 넘는다. 단역까지 포함하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며, 한 달에 30편 가까운 작품에 출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대표작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는 최고 시청률 65%를 기록했다. 그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상징과도 같은 ‘대발이 아버지’를 통해 당시 사회 분위기 속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극 분야에서도 존재감은 확고했다. 1970~80년대 ‘사모곡’, ‘인목대비’, ‘상노’, ‘풍운’, ‘독립문’ 등에 꾸준히 출연했고, 이후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을 통해 묵직한 카리스마와 내공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미 ‘거장’으로 평가받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그는 끊임없이 연기의 폭을 넓혔다. 70대에 들어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는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 연기로 큰 인기를 얻으며 ‘야동 순재’라는 별명으로 어린 팬들까지 사로잡았다.
예능 ‘꽃보다 할배’(2013)에서는 나이를 잊은 열정과 강인한 체력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도전은 계속됐다. 그는 연극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무대를 뜨겁게 채웠다. 특히 200분에 달하는 ‘리어왕’의 방대한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 찬사를 받았다. 2023년에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연출하며 연출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지난해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멈추기 전까지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2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하며 녹슬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줬다. 같은 해 KBS 연기대상에서는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평생 연기에 집중해온 그는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은 이력도 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되며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자당 부대변인·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써왔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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