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아이'를 세상 밖으로…디딤돌인문학, 삶 의지 높였다
뉴스1
2025.12.10 11:00
수정 : 2025.12.10 11:00기사원문
2025.12.5/뉴스1 김영운 기자
(서울=뉴스1) 황진중 기자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인문학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굳은 땅을 파내고 돌을 걷어냈을 뿐입니다. 여기서 멈추면 맑은 물을 보기 어렵습니다."
최저기온 영하 5도를 기록한 지난 5일, 시흥에 있는 지역자활센터 베다니마을 뜨란채 쉼터에서 만난 강선희 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노숙인·재소자·자립생활자 대상 인문학 강의 '디딤돌 인문학'의 효과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번 사업은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이후 인문학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시키고자 문체부가 추진한 국책 사업이다. 현장에서는 참여자들의 극적인 변화를 끌어내며 '인문학적 복지'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1년 단위의 불안정한 사업기간과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 본질적인 사업 목표인 '사회적 자립' 달성을 위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우려한다. 효용성이 확인된 만큼 더 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문체부, 인문학으로 '사람' 살리다…"음지에서 양지로"
디딤돌 인문학은 1995년 미국 얼 쇼리스가 빈민들을 대상으로 시작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클레멘트 코스'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춰 도입한 사업이다. 단순히 생계비를 지원하는 복지를 넘어 철학·문학·역사·예술 등 인문학 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문체부는 국비 5억 원을 투입해 이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인문공동체 책고집이 수행기관으로 선정돼 교도소·구치소 16곳, 노숙인 생활시설 18곳, 지역자활센터 19곳 등 총 53개 기관에서 500회 이상의 강의를 진행했다.
올해 사업은 최근 '제1회 팬지문학상' 시상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성과는 정량적 수치를 넘어 참여자들의 내면적 변화에서 나타났다. 문학상에는 참여자들이 쓴 시와 수필, 산문 등 총 288편이 접수됐다.
대상을 수상한 강진민 씨 사례는 이 사업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는 수기 '창백한 아이'를 통해 어린 시절의 가난과 상처, 이를 마주하며 느꼈던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강진민 씨는 "처음에는 다들 참여를 꺼리지만 막상 강의를 들으면 아주 즐거워한다. 음악 치료나 자화상 그리기 같은 프로그램은 꼭 필요한 시간"이라면서 "강의를 듣고 나면 에너지를 얻게 되고, 그 여운이 이튿날까지 머릿속에 맴돌며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디딤돌 인문학을 통해 정말 오랜만에 인문학 강의를 접하게 돼 반가웠다"면서 "평소 배우고 싶었던 글쓰기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감명 깊은 글귀들을 통해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강진민 씨가 생활하는 베다니마을의 강선희 원장은 "강진민 씨는 늘 고개를 숙이고 말수가 없었으며,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무기력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강 씨의 굽은 어깨는 펴졌고, 표정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강 원장은 "인문학이 그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냈다"라면서 "이 사업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일으켜 세우는 사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참여자 A 씨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으나 강의를 들으며 '사람답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 같은 사례는 문체부가 추진한 디딤돌 인문학이 단순한 문화 향유 기회 제공을 넘어 실질적인 '사회적 치료제'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물 팠지만, 아직 얕아"…'최소 3년' 지속성 담보돼야
현장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사업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단발성'이다. 현재 디딤돌 인문학 사업은 1년 단위로 예산이 책정되고 수행 기관이 선정되는 구조다.
강 원장은 이를 '우물 파기'에 비유하며 지속성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그는 "이제 막 우물을 파서 흙과 자갈을 걷어낸 상태다. 아직 마실 수 있는 맑은 물은 나오지 않았다"면서 "여기서 사업이 멈추거나 지원이 끊긴다면, 그 우물은 다시 메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파놓은 우물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올라 참여자들이 그 물을 마시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최소 3년의 시간은 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과거 민간 일부에서 주도한 노숙인·재소자·자립생활자 대상 인문학 강좌들은 대부분 일회성 프로젝트에 그쳤다. 평가 점수나 연구비 수주를 위해 1년 정도 진행하다가 철수하는 방식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참여자들에게 '우리는 실험 대상인가'라는 박탈감과 상처만 남기기도 했다.
최준영 책고집 이사장은 "가난과 고립 속에 오랜 기간 방치되었던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시범 사업 성격인 올해를 기점으로, 2026년부터는 사업을 정례화하고 최소 3년 이상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육 효과가 체화되고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상호신뢰' 형성이 필수적이다. 낯선 강사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 있는 참여자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해마다 사업 진행 여부가 불투명하게 남을 수 있는 것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박물관 한번 가기도 벅차…예산 현실화 시급
사업 확대와 꾸준한 진행을 위한 예산 현실화 역시 시급한 과제다. 올해 문체부가 책정한 예산은 5억 원이었으나, 실제 수행기관인 책고집이 집행한 금액은 약 4억 3000만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책고집은 이 금액으로 전국 53개 기관에서 500회가 넘는 강의를 운영했다. 사업 확대 등을 위해서는 강사료와 운영비 등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서는 '체험형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크다. 강의실에 앉아서 듣는 이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문학기행을 떠나는 등 외부 활동이 참여자들에게 주는 자극과 정서의 회복 효과 역시 큰 것으로 평가된다.
베다니마을은 이번 팬지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강원도 고성으로 인문기행을 다녀왔다. 강 원장은 "참여자들이 미술관 관람이나 여행을 통해 느끼는 정서적 해방감은 말로 다할 수 없다"며 "하지만 현재 예산으로는 버스 대절비나 입장료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 1년에 한 번 가기도 벅찬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최준영 이사장은 "전국의 지역자활센터가 250곳, 교도소가 60여 곳에 이르지만 현재 디딤돌 인문학 혜택을 받는 곳은 전체의 10~20% 수준에 불과하다"면서 "좋은 사업이라면 더 많은 국민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산이 증액되면 참여기관 수를 늘리고 프로그램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장에 있는 교육·복지 전문가들은 문체부가 주관한 디딤돌 인문학에 대해 다양한 사람, 인문학이 필요한 사람이 정서를 회복하고 삶에 대한 에너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운 사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 이사장은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가난한 사람도 얼마나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교육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면서 "문체부의 의지로 시작된 이 사업이 시범 단계를 넘어 정착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산 증액과 대상 확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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