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꿈꾸는 존재를 보여주다 '한복 입은 남자'

파이낸셜뉴스       2025.12.29 15:23   수정 : 2025.12.29 18:22기사원문
[칼럼] 엄현희의 생각하는 극장







[파이낸셜뉴스] ‘대규모 스케일과 시각적인 완성도’는 뮤지컬 제작사 EMK의 특성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상훈의 소설 '한복 입은 남자'의 픽(pick)은 그런 점에서 EMK의 스타일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선택이었다. 방대한 서사가 실어 나르는 궁궐, 대자연, 조선에서부터 피렌체로의 이동, 근대와 현대의 교차 등은 무대를 경탄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의 천 석이 넘는 관객들을 시종 압도하며 휘어잡는 힘. '한복 입은 남자'는 묵직한 중량감을 선사하며 객석을 사정없이 밀어붙인다.

소설은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의 노년기에 대한 ‘거대한 판타지’를 품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장영실이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한때 교황의 총애를 받지만 시골에서 은거하며 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가르치며 영감을 주었다 말한다. 한때 뛰어났으나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복원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며, 그 마음들이 영웅화나 신화화로 한껏 부풀어져 출현한 듯하다.

따라서 공연은 알려져 있는 장영실의 일대기 역시 세종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당시 사회구조(신분제)에 반항하는, 깨어 있는 존재로 구성한다. 이러한 장영실 캐릭터는 별을 관측하며 하늘을 비행하기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표현된다. ‘비차’(글라이더, 무동력 비행기) 넘버와 마지막에 배치된 ‘비차 서프라이즈’는 그야말로 장영실의 노래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유와 꿈의 이미지가 장영실에게 입혀진다.

꿈꾸는 존재로서의 장영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거꾸로 그를 억압하는 조건을 묘사할 필요가 있다. '한복 입은 남자'는 특히 궁중의 장면들이 눈부시게 고고하며 권위적이다. 비현실적인 색감의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은 신하들은 대규모의 앙상블 군무를 보여준다. 장영실을 보호하며 고뇌하는 세종을 둔 채 한꺼번에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무용이 기막히며, 그 가운데서 세종은 한숨을 토해내듯, 결단하는 ‘너만의 별에’를 부른다. 장영실과 세종의 우정이 서로를 마주하거나 단독 하이라이트 장면을 교차시키며 표현된다.

다만 공연은 소설의 모든 설정에 너무 욕심을 낸 듯하다. 이야기 몇몇 줄기에서 주제가 변주되거나 강화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거나 반복처럼 다가온다. 현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한국과 이탈리아 연구자 그룹에 의해 그림 ‘한복 입은 남자’가 레오나드로 다빈치에 의해 그려졌고 모델이 장영실이란 숨겨진 역사를 드러내려는 서사가 진행되는데, 이들은 공연에서 과거와 환상만큼 정교하게 구축되지 못한다. 세밀한 표현보다 후루룩 훑어가는 지점들에서 작품의 힘이 다소 빠진다. 게다가 그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들을 자칫 튀어 오르게 만들어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린다. 차라리 이야기 줄기 몇몇의 과감한 가지치기를 시도했다면 어떠했을까.

'한복 입은 남자'는 한국적인 소재로 접근한 EMK의 첫 번째 창작 뮤지컬이다.
제작사의 접근 방식과 고유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이번 공연은 무엇보다 뮤지컬 장르가 상상과 환상 세계를 다룰 때의 장점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대로 호출된 상상은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이자 꿈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억압된 현실을 넘으려는 ‘장영실’이며 그렇게 무대와 통한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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