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손잡았는데…MAGA는 왜 빅테크를 거부하나
파이낸셜뉴스
2025.12.30 11:14
수정 : 2025.12.30 11:34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핵심 역할을 했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이 트럼프 대통령과 빅테크 기업들의 동맹에 강한 반감을 보이고 있다. 인공지능(AI)을 둘러싼 논쟁은 강경 마가 진영에게 단순한 정책 문제가 아니라, 마가의 정체성과 향후 미국 정치의 향방을 가르는 '정치 전선'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의 갈등이 내년 중간선거는 물론, 차기 대선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빅테크의 밀월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미국이 AI와 가상자산 분야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미국 우선주의' 경제 정책을 관철하는 데 기술 기업들의 지원을 활용해 왔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올해 아마존, 애플, 구글, 메타, 엔비디아, 오픈AI, 오라클은 미국 내 데이터센터와 제조 프로젝트에 총 1조40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빅테크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손을 잡으면서 규제 완화 기대와 정책 불확실성 완화라는 효과를 동시에 누렸다. 업계 친화적인 정책 기조 속에서 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 주가는 급등했다. 특히 엔비디아는 고성능 AI 칩인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받으면서 상징적인 수혜 기업으로 떠올랐다.
강성 마가의 반발
그러나 마가 핵심 세력은 이 같은 움직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전략가이자 마가의 이념적 설계자로 평가받는 스티브 배넌이다. 배넌은 "마가 지지자들은 급진 좌파보다 기술 업계 종사자들, 즉 실리콘밸리에 대해 더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다"며 "마가 지지층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려 했던 기술 재벌들이 갑자기 대통령의 새로운 절친이 된 상황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가 핵심부가 빅테크 동맹을 비판하는 이유는 크게 ▲빅테크의 보수 검열 ▲마가 지지층의 일자리 감소 ▲AI 유해성 논란 ▲반엘리트주의 등 네 가지로 요약된다.
마가가 잊지 않는 검열
마가 진영이 빅테크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된 출발점은 '검열' 논란이다. 마가 지지자들은 빅테크 플랫폼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보수 성향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해 온 권력 주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들에게 빅테크는 단순한 기술 기업이 아니라, 여론 형성과 선거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 행위자다.
미국 경제·혁신 정책 싱크탱크 ITIF는 보고서에서 마가 지지자들이 빅테크 경영진을 좌파 성향의 엘리트로 인식하며, 이들이 플랫폼의 규칙과 알고리즘을 활용해 보수주의자들을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아 왔다고 믿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인식은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굳어졌다. 대표적 사례가 2020년 대선 직전 보수 성향 매체 뉴욕포스트가 보도한 헌터 바이든 노트북 기사다. 당시 트위터는 해당 보도를 '해킹된 자료'로 분류해 기사 공유를 차단하고 계정을 정지했다. 이 조치는 보수 진영에서 단순한 운영 판단이 아니라, 대선에 영향을 미친 검열이자 선거 개입으로 받아들여졌다.
둘째는 2021년 1·6 국회의사당 사태 이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계정은 페이스북, 트위터(X), 유튜브 등 주요 플랫폼에서 일제히 정지됐고, 애플·구글·아마존은 보수 성향 소셜미디어(SNS) 파를러(Parler)를 앱스토어와 클라우드 서비스에서 퇴출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인의 계정을 민간 플랫폼이 삭제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에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됐다. 보수 진영은 이러한 조치들이 단순한 콘텐츠 관리가 아니라 정부와 빅테크 간의 공조를 통한 표현의 자유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AI와 노동자 위기
최근에는 일자리 문제가 오히려 갈등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마가 진영에서는 AI를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위기 중 하나로 인식한다. 사회와 정치권이 이를 충분히 시급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확산되고 있다. 보수 성향 매체 데일리와이어의 인기 팟캐스터 맷 월시는 AI가 통제 없이 발전하면서 인류가 "몽유병 환자처럼 디스토피아적 미래로 걸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 인플루언서 터커 칼슨 역시 AI의 부상을 비판적으로 다루며, AI를 오컬트와 '짐승의 표'에 빗댔다. 이는 기술 문제가 아닌 종말론적·종교적 위협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의회에서도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미주리주 공화당 상원의원 조쉬 홀리와 테네시주 공화당 상원의원 마샤 블랙번은 대출 승인과 의료 진단 등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서 AI 사용을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홀리 의원은 AI가 규제 없이 확산될 경우 소수 빅테크 기업에 권력이 집중되고 노동자 계층이 붕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배넌 역시 AI가 규제 없이 발전할 경우 대규모 일자리 붕괴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그 피해가 트럼프 지지층인 미국 노동자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도덕과 반엘리트
마가 진영의 또 다른 축인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통제받지 않는 AI의 유해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은 AI 챗봇이 사회·도덕 질서를 훼손할 수 있다고 보고, AI가 제공하는 가상 동반자 관계가 결혼과 가족 제도를 약화시키며 음란물 제작이나 '딥누드'와 같은 인권 침해적 용도로 악용될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특히 오픈AI의 챗GPT를 비롯한 챗봇과 장시간 상호작용한 이후 살인 사건이나 청소년 자살 사례가 보고되면서 반발은 더욱 격화됐다. 실제로 16세 소년 애덤 레인의 가족은 정신건강 상담 목적으로 챗봇을 사용한 뒤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며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가족 측은 챗봇이 자살에 사용될 수 있는 도구에 대한 조언까지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오픈AI는 소송 이후 청소년 대상 안전 수칙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두고 보수 성향 언론인 메긴 켈리 등은 "끔찍한 일"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마이크 데이비스는 향후 AI 기업들이 의회에서 규제 완화를 요구할 때, 레인 가족의 인터뷰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빅테크 책임론을 부각했다.
이 같은 흐름은 마가의 반엘리트주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마가는 워싱턴 정치 엘리트, 월가 금융 자본, 실리콘밸리 테크 엘리트가 미국을 망쳤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 최고 부자들이 포진한 빅테크는 자유무역과 이민 친화 정책, 노동자보다 기술과 자본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마가 진영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우파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기술 정책 책임자 웨스 호지스는 NYT에 "빅테크는 우리 연합의 동맹이 아니다"라며 "우리의 임무는 빅테크와 그들의 독특한 권력 집중이 보수 진영에 위협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넌은 ABC뉴스 인터뷰에서 "AI로 사라질 일자리들이 결국 미국 노동자 계층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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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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