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불성인 부인에게 약초를 끓여 훈증요법으로 치료했다
파이낸셜뉴스
2026.01.03 06:00
수정 : 2026.01.03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옛날 송나라 때 육엄(陸曮)이란 의원이 있었다. 육엄은 당시의 의술을 주름잡아 명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서씨는 마을의 의원들에게 왕진을 청했지만 마을 의원들은 시침(施鍼)이나 탕약 처방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치료 도중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칫 침이나 탕약 때문이라는 오명을 쓸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서씨는 세간에 명의로 소문이 난 육엄이라면 부인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육엄의 약방은 마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서씨 집안에서 육엄의 약방이 있는 마을까지는 200리(약 80km)가 넘었다. 그럼에도 서씨는 하인들에게 육엄을 모시고 오라고 가마를 보냈다.
하인들은 하루 반나절 만에 육엄의 약방에 도착했다. 하인들이 육엄에게 서씨의 서찰을 보이자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네. 게다가 환자가 생사를 오간다면 더더욱 망설일 문제가 아니네.”라고 하면서 흔쾌히 허락했다. 가마 곁에는 육엄의 제자도 동행했다.
육엄이 마을에 도착하자 저 멀리 곡소리가 들렸다. 육엄은 ‘내가 너무 늦은 것인가?’라고 낙담을 했다. 서씨 집에 도착해서 부인이 누워있는 방문을 열어봤더니 이미 죽었는지 미동이 없었다. 그러나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진맥을 해봐야 했다.
육엄은 가족들에게 곡을 멈추도록 하고 진맥을 했다. 다행히 맥은 미세하게나마 뛰고 있었고 가슴에는 온기가 있었다. 아직 절명한 것은 아니었다.
육엄은 가족들에게 부인이 괴로워했던 증상들을 물었다. 그러자 서씨는 “부인은 최근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을 자주 했소.”라고 했다.
육엄이 다시 진맥을 해 보니 미세하게나마 허맥(虛脈)과 삽맥(澁脈)이 함께 잡혔다. 육엄은 서씨에게 “부인의 증상은 바로 혈운(血運)입니다. 혈운은 혈허(血虛)나 어혈(瘀血)로 인하여 정신이 혼미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병증입니다.”라고 했다.
원래 혈운은 출산 후 피를 많이 흘려 심비(心脾)가 허해서 뇌를 자양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어지럽고 오심번열(五心煩熱)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은땀이 나고 몹시 수척해지며 혀가 붉게 되는 병증을 말한다.
혈운은 오늘날로 치면 출산 전후 혈액손실이나 혈전, 순환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빈혈성 쇼크, 자율신경실조증, 급성 뇌기능 장애와 유사한 병증이다. 보통 출산 후에 나타나지만 어혈이 심한 경우는 이처럼 산달에도 나타나기도 한다.
육엄은 “홍화(紅花) 수십 근(斤)이면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서씨가 “아니, 지금 부인이 의식이 없어 죽어가는 판에 제아무리 효과가 있는 처방이라도 먹지를 못할 텐데, 어찌 효과를 내서 살릴 수 있다는 말이요? 내 돈은 얼마든지 낼 터이니 홍화든 뭐든 살려만 주시오.”라고 화를 내듯이 물었다.
홍화(紅花)는 잇꽃으로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어혈을 제거하면서 이로 인해서 나타나는 통증을 완화하는 데 쓰이는 약재다. 전통적으로 어혈 치료의 최고 명약으로 알려져 있다.
육엄은 옆에 있던 제자에게 “너는 지금 당장 이 마을의 모든 약방을 돌면서 홍화를 있는 데로 구해 오거라.”라고 했다. 그리고 부인의 남편에게는 “지금 바로 밥을 짓는 큰 솥이나 소여물을 삶는 솥에 물을 넣어 끓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서씨는 육엄이 시키는 대로 큰 솥에 물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 시작할 무렵 제자가 홍화를 한 가마니 정도나 구해왔다. 육엄은 홍화를 끓고 있는 솥 물에 모두 부어서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집안의 하인들을 시켜서 부인의 방안에 큰 나무대야 세 개를 이어서 붙여 놓고는 그 위에 대나무로 창문살을 만들어 걸쳐 놓았다. 이어서 펄펄 끓는 홍화탕을 대야에 가득 부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부인을 눕혔다.
대야에서는 홍화탕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김이 식으면 다시 뜨거운 홍화탕으로 갈아주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부인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절이 지나자 부인이 눈을 뜨고 말을 할 수 있었다.
육엄은 서씨로부터 사례를 받고 약방으로 향했다. 서씨는 다시 가마를 대동해 주겠다고 했지만 육엄은 “유랑 삼아 제자와 함께 걸어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약방으로 걸어가는 길에 제자가 묻기를 “혈운에 어찌 홍화가 효과를 내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육엄은 “홍화는 출산 후 혈운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증상, 배 속의 악혈이 다 빠져나오지 않아 옥죄듯 아픈 증상, 태아가 배 속에서 죽은 증상 등에는 모두 술에 달여 복용한다. 홍화는 많이 쓰면 어혈을 깨뜨리고 적게 쓰면 혈을 자양한다. 부인을 치료하는 데 쓰인 홍화가 수십 근이 된 것은 어혈을 풀기 위함이었다. 또한 홍화는 여성들에게 적당량에서는 혈을 생성하고 마른 것을 적셔 주며, 과량에서는 통증을 멎게 하고 종기를 흩어 내며, 월경을 통하게 한다.”라고 했다.
제자는 환자가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는 탕약을 먹이지 못하자 홍화 훈증법을 이용한 스승의 의술에 놀랐다. 이 둘은 다시금 약방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벌써 날이 어두워져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갔다. 그 날밤, 제자는 밤새는 줄도 모르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육엄의 홍화 훈증법은 훗날 진나라 때 허윤종(許胤宗)이란 의원이 당시 황후인 유태후(柳太后)의 풍병(風病)을 치료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당시 유태후가 풍병으로 인해서 이를 악물고 약을 복용할 수가 없자, 허윤종은 황기건중탕을 끓여서 침상 아래에 두고 훈증을 했는데, 저녁이 되자 말을 할 수 있었고 이후 다시 내복약을 쓰자 나았다.
옛말에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어떻게든지 환자를 살리겠다는 일념이 다양한 방법으로 약물을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 냈다. 약물을 복용해서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을 내치법(內治法)이라고 하고, 연고로 만들어 외부에서 바르거나 탕약으로 찜질을 하는 것을 외치법(外治法)이라고 한다. 훈증요법 또한 약물을 달여 나온 증기를 몸에 쐬어 약효를 피부와 호흡을 통해 치료 효과를 내는 외치법 중의 하나였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의부전록>醫術名流列傳. 宋. 陸曮. 按《船窻夜話》:陸曮, 奉化人, 以醫術行於時. 新昌徐氏婦病產, 不遠二百里輿致之, 及門, 婦已死, 但胷堂間猶微熱. 陸入視之曰:"此血悶也, 能捐紅花數十斤, 則可以活." 主人亟購如數, 乃爲大鍋以煮, 候湯沸, 遂以三木桶盛湯於中, 取牕格籍, 婦人寢其上, 湯氣微, 又進之. 有頃, 婦人指動, 半日遂甦. 蓋以紅花能活血故也. (의술명류열전. 송. 육엄. 선창야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육엄은 봉화 사람이며, 의술로 당시를 주름잡았다. 신창의 서씨 부인이 난산으로 고생하자 200리를 멀다 않고 수레로 그를 불러왔는데, 문에 당도하니 부인은 이미 죽었고 다만 가슴 한가운데쯤에만 아직 온기가 있었다. 육엄이 들어가서 보고 "이는 혈민입니다. 홍화 수십 근을 아낌없이 쓰면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인이 서둘러 필요한 양만큼을 사오자, 큰 솥에다가 끓어오를 때까지 달여서 나무 대야 세 개에 탕액을 채운 다음, 창문살을 걸쳐 놓아 부인을 그 위에 눕히고 증기가 약해지면 뜨거운 탕액으로 다시 채웠다. 한참 후 부인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한나절이 지나자 드디어 소생하였다. 아마도 홍화가 능히 활혈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초강목>○ 紅花. 産後血運口噤, 腹內惡血不盡絞痛, 胎死腹中, 並酒煮服. 亦主蠱毒.開寶 多用破留血, 少用養血.震亨 活血潤燥, 止痛散腫, 通經. (홍화. 출산 후 혈운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증상, 배 속의 악혈이 다 빠져나오지 않아 옥죄듯 아픈 증상, 태아가 배 속에서 죽은 증상 등에는 모두 술에 달여 복용한다. 또한 고독을 주치한다. 많이 쓰면 어혈을 깨뜨리고 적게 쓰면 혈을 자양한다. 혈을 생성하고 마른 것을 적셔 주며, 통증을 멎게 하고 종기를 흩어 내며, 월경을 통하게 한다.)
<경악전서>許胤宗, 治唐ㆍ柳太后病風, 脈沈欲脫, 云"服湯藥無及矣". 卽以黃芪ㆍ防風煮湯數十斛, 置牀下薰薄之, 是夕果語, 更藥之而愈. (허윤종이 당나라 유태후의 풍병을 치료했는데, 맥은 침하고 양탈하려고 하여 "탕약을 복용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황기방풍탕 수십 곡을 달여서 침상 아래에 두고 훈증했는데, 그날 저녁에 말을 했고 다시 약을 쓰자 나았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