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 월드비전 회장 "세계에 받은 사랑, 세계에 돌려줄 때"
파이낸셜뉴스
2025.12.30 15:17
수정 : 2025.12.30 15:16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한국이 어려울 때 세계가 도왔듯, 이제 받은 것을 흘려보내야 할 때입니다."
조명환 한국월드비전 회장(69)이 지난 9일 서울 영등포구 월드비전 본사에서 가진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월드비전이 상임이사국으로서 아동보호와 인도주의 대응, 긴급구호 등 여러 핵심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와 피란민이 넘쳐나 세계의 후원을 받아야 했던 '수혜국'에서 국제 인도주의 무대의 중심인 '상임이사국'에 우뚝 선 것이다.
하지만, 한국월드비전의 상임이사국 선출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국제 구호를 위한 부단한 헌신과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국제구호를 이끄는 상임이사국이 되기까지의 여정과 역사적 의미, 향후 과제들을 조 회장에게 들어봤다.
― 올해는 한국월드비전 창립 75주년이다. 75년의 역사적 의미와 가장 큰 전환점은?
▲저는 월드비전의 75년 역사가 한국의 현대사와 거의 겹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전쟁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고, 당시 GDP 수준은 케냐보다도 낮았다. 그 시절 한국에서 월드비전이 보육과 구호를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그 한국이 오늘날에는 세계 3위 규모의 후원국으로 성장했고, 전 세계 월드비전의 전략과 운영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상임이사국에 선출됐다.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전환한 한국은 국제개발 역사에서도 매우 특별한 사례다.
상임이사국은 국가 규모로 결정되는 자리가 아니라, 파트너십 전체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로 판단된다. 한국이 이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지난 75년 동안 한국월드비전이 만들어 온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 한국월드비전은 전쟁 직후 '수혜국'에서 출발해 주요 국가사무소로 성장했는데, 국제개발 역사 속에서 이 여정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국월드비전의 역사는 국제개발 맥락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1950년대 우리는 월드비전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던 나라 중 하나였다. 생존 자체가 과제였고, 개발이라는 개념은 사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국은 짧은 기간 안에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성장을 이뤘고, 월드비전 안에서도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전환한 최초의 사례가 됐다. 많은 나라가 여전히 지원을 받는 구조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 변화는 국제개발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전환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월드비전은 '현장을 실제로 아는 기관'이라는 강점을 갖게 됐다.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지금도 중요한 자산이다. 현재 한국월드비전은 미국·캐나다와 함께 가장 중요한 후원국 중 하나로, 혁신적인 모금 모델과 참여형 캠페인 역량에서도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 지난달 한국이 월드비전 국제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상임이사국에 확정됐는데, 이 결정의 의미는?
▲상임이사국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월드비전 전체의 전략과 방향을 함께 결정하는 핵심 구조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아니라, 얼마나 헌신적으로 파트너십에 기여해왔는지가 기준이다.
이번 결정은 한국이 수십 년간 월드비전과 함께 만들어 온 성과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만장일치로 선출됐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현장에서 여러 국가 리더들이 한국월드비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그 평가가 진심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 상임이사국인 한국월드비전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은.
▲이제 우리는 월드비전 전체의 미래를 함께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글로벌 의사결정 과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아동보호, 인도주의 대응, 긴급구호, 교육, 생계, 기후변화 같은 핵심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또한, 한국이 강점을 가진 모금, 디지털, 캠페인 분야의 경험을 파트너십 전체와 공유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성이다. 상임이사국은 결정에 대해 전 세계 아이들과 후원자들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다.
― 내년 이후 월드비전이 집중하려는 핵심 전략은.
▲전쟁, 재난, 기후위기, 경제적 격차 등으로 취약한 아이들과 가정은 점점 더 어려운 환경에 놓이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전문적이고, 더 빠르며, 더 공감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후원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기부금 감소와 정부 인도주의 예산 축소는 모든 NGO가 직면한 과제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열어 두는 것'이 앞으로의 핵심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AI 시대에는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많이 나누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NGO는 후원자의 마음을 현장까지 안전하게 전달하는 전문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와의 협력 역시 중요하다.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와의 협력 사업처럼 정부가 구조를 만들고 NGO가 현장을 섬기는 방식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 자립마을, 글로벌 6K, 1000명의 소녀들, FMNR 등 여러 사업의 특징은.
▲자립마을 사업은 월드비전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델이다. 단기 지원이 아니라 교육·보건·식수·생계·아동보호를 통합해 지역이 스스로 서도록 돕는 구조다. '후원을 멈추는 후원'이라는 개념이 이 사업에 담겨 있다.
글로벌 6K는 시민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캠페인이고, '1000명의 소녀들'은 조혼 위험에 놓인 여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통합 지원 모델이다. FMNR은 기후위기 시대에 주목받는 산림복원 사업으로, 월드비전의 기후 전략에서 중요한 축이 될 것입니다.”
― 투명성과 책임성은 후원자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인데, 이를 어떻게 강화하나.
▲투명성과 책임성은 NGO의 생명이다. 한국월드비전은 정부, 지자체, 외부 감사, 국제본부 감사 등 다중 감사 체계를 갖추고 있다. 2024년 기준 행정비 비율도 11%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 후원금 투명성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후원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다. 국내에서 시범 적용을 시작했고, 향후 국제본부까지 확장하는 것이 목표다.
― 본인에게 월드비전은 어떤 의미인가.
▲저는 후원아동 출신이다. 월드비전에서 일하는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선택이다. 45년 동안 매달 15달러를 후원해주신 한 후원자 덕분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다.
그분은 평생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하셨을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그 이유가 '후원 자체가 주는 행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 삶은 후원의 힘을 증명하는 이야기다. 월드비전은 제게 직장이 아니라 사명이다.
― 취임 당시 '월드비전 3.0 시대'를 선포하고, 기술·ESG·혁신을 기반으로 한 미래형 NGO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가장 성과가 있었던 부분과 아직 해결할 과제는.
▲월드비전 3.0을 선언하며 '이제 월드비전이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자'고 했다. 그 결과 가장 큰 성과는 국제기구 협력과 환경·사회·지배구조(ESG)·기후 분야로의 본격적인 확장이다. 국제기구 협력 사업은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했고, 조직 전체의 외연과 영향력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또 ESG 조직을 신설하고 블루카본, FMNR 같은 미래지향적 모델을 도입하며, '미래형 NGO'로의 전환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반면, 아직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투명성과 책임성을 기술 기반으로 완전히 구현하는 일이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 후원금 투명성 플랫폼을 국제 파트너십 전체로 확장하는 것은 기술과 비용 측면에서 큰 도전이지만, 월드비전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완성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 상임이사국으로서 한국월드비전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의제는.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첩성과 디지털 전환이다. 월드비전은 규모가 큰 만큼 절차가 복잡해질 수 있다. 한국은 디지털과 AI 분야에 강점이 있기 때문에, 파트너십 전체의 속도를 높이고 국가 간 디지털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 한국월드비전이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한국만의 차별화된 강점?
▲한국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문화적 확산력, 즉 K컬처다. 문화 콘텐츠의 영향력을 국제 인도주의 참여로 연결할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다.
홍보대사와 콘텐츠 협업을 통해 자발적 후원이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사례를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이는 단순한 유명인 마케팅이 아니라, 문화가 참여를 촉발하는 구조다. 앞으로 한국월드비전은 ‘문화·콘텐츠 기반 글로벌 참여 플랫폼’을 체계화해 국제 인도주의 협력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75주년을 맞아 한국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국제사회에서 '부러움'과 '존경'은 다르다. 진정한 존경은 얼마나 나누느냐에서 나온다. 과거 한국이 어려울 때 세계가 도왔듯, 이제 한국이 받은 것을 흘려보내야 할 때다. '성장한 나라'에서 '나누는 나라', 나아가 '존경받는 나라'로 가는 길에 한국사회가 함께하길 바란다.
― 향후 개인적 목표는.
▲저는 후원아동 출신으로서 제 삶에 어떤 시대적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왜 내가 후원을 받아 여기까지 왔는가를 늘 생각한다. 제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후원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고, 그 한 사람은 다시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저의 별명은 '꼴찌 박사'다. 꼴찌였던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지금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반드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제 삶으로 보여주고 싶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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