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승리' 일본을 열강 반열에 올려놓은 변방 작은 섬
파이낸셜뉴스
2025.12.30 19:06
수정 : 2025.12.30 23:54기사원문
(2) 대마도(對馬島)
부산서 50㎞…육안으로도 보여
수평선 너머 '머리 맞댄 말' 같아
지도에 없는 요새 '만제키세토'
도토리 보관창고 '카시보노' 등
척박한 환경 속 치열한 삶의 흔적
소싯적 나는 수평선 위에 그림자처럼 걸린 대마도를 보면서 살았다. 절영도와 용두산이 겹쳐진 오른편으로 나지막이 보였다. 50㎞ 멀리 아른거리는 섬의 모양새가 두 마리 말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본 측 '고사기(古事記)'는 '진도(津島)'라고 쓰고, '쓰시마'라고 읽었다. 대륙으로 건너가는 '나루섬'이란 인식이다. 8세기의 기록은 '대마(對馬)'라고 썼고, '쓰시마'라고 읽었다. 중국의 '위지동이전'에서는 '대해국(對海國)', '수서(隋書)'에서는 '도사마(都斯麻·쓰시마와 발음이 유사)'라고 기록했다. 중국의 기록을 중시했던 조선에서 '대마'라고 적은 것은 내가 본 대로 '머리 맞댄 말'의 인식이 반영된 것 아닐까.
1885년부터 2년여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당시, 대마도는 긴장 속의 고요함을 유지했다.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를 경계한 일본으로서는 불필요한 행동(요새 구축)을 자제했다. 정중동이라고나 할까. 내면으로는 바다 경계선의 강화 필요성을 체득하였고, 영국 함대가 철수한 뒤 대마도 요새화는 시작되었다. 그 과정의 하나가 '만제키세토' 운하를 건설하는 해군의 전략이었다. 상도와 하도로 구분되는 대마도는 자연 상태로는 하나의 섬이었다. 한가운데에 호수처럼 굴곡진 두 개의 만이 수로를 이룬다. 대한해협 쪽이 바다로, 대마해협 즉 후쿠오카를 향하는 쪽의 끝부분이 폭 25m의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1901년 일본 해군이 소형함정의 이동 목적으로 이 부분을 뚫어서 수로 공사를 했다.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은 만제키세토가 후일 러일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으로 진격했던 발틱 함대의 후면부를 기습하는 천우신조의 공로를 세웠다. 발틱 함대는 만제키세토에 잠복했던 일본 함정의 존재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동해 쪽으로 줄행랑치던 발틱 함대는 울릉도 앞에서 침몰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상의 판도가 뒤집어지면서 일본은 명실공히 제국(帝國)의 반열에 올랐다. 그 결과 1905년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함으로써 식민지가 되었던 역사가 읽힌다.
대마도 면적의 90%가 산, 평지라고는 손바닥만 하게 서너군데 보인다. 기본적으로 곡물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조선 남해안에서 해적질을 일삼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밀무역을 포함한 교역과 노략질로 획득하는 곡물에 더해서 주식의 보조로 이용됐던 도토리와 고사리가 있었다. 명치 초기까지 대마도에서는 두 가지가 중요한 식량원이었다. 도토리의 식량화는 탄닌산을 제거해야 가능하다. 도토리의 탄닌산 제거 방식은 두 가지로 보고되었다. 하나는 발효, 다른 하나는 물세척이다. 전자는 도토리를 땅에 묻어 지열 발효로 탄닌산이 사라지면 그것들을 가루로 만들어서 빵을 구웠다. 후자는 도토리묵을 만드는 방식이다. 개울가에 일정한 형태의 구덩이들을 파고, 내부는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작은 돌로 촘촘히 벽을 쌓았다. 그것을 '카시보노(カシボノ)'라고 부른다. 유적 명칭으로 기록된 일본 측의 보고서들이 있지만, '카시'는 떡갈나무, '보노'는 식량이 나오는 곳을 의미하는 방언에서 유래된 말이다. 냇물이 흘러 들어가도록 개울가에 조성한 에도시대의 카시보노들이 신사의 후면부에 자리했다. 신사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주민들의 삶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고사리는 뿌리에 전분이 있다. '사기'의 '백이열전'이 전하는 은주(殷周) 왕조 교체기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면서 문왕(文王)을 뿌리쳤다는 충절 상징의 일화가 있다. 그들이 식량으로 의존했던 것은 고사리의 뿌리였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고사리 뿌리를 갈아서 만든 흑색의 고사리떡(蕨餠)이 상용된다. 고사리라고 하면, 나물만 생각하는 신화의 오산을 지적한다.
필자가 카시보노를 본 곳은 대마도의 남단 마을인 '츠츠'의 타구즈다마신사(多久頭魂神社) 경내다. 이 동네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51년)에 '두두포(豆豆浦)'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고대 한일관계와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얽힌 곳이다. 이 신사에는 일본국이 지정한 중요문화재인 청동북(金鼓 직경 77.7㎝·폭19.5㎝)이 있는데, 옆면에 "理源乙巳五月日 晉陽府鑄成 福寺飯子一口"라는 명문이 있다. 반자라고도 불리는 금고는 공양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타종하는 용도다. 이 청동북은 우리나라의 2013년도 문화재위원회 제4차 동산분과위원회 회의록 '고려시대 반자(半子) 목록'에도 '을사명금고(乙巳銘金鼓)'로 기록했고, 을사년을 1245년으로 판정했다. '진양부'의 사찰명에 대해서도 흥미롭지만, 북의 주조 연도에 물음표를 붙인다. 북을 발원한 리겐(理源 832~909년)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의문이 발생한다. 9세기 일본의 명승 리겐이 생존했던 때를 감안하면, 을사년은 885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진양부라는 행정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함께 소장된 고려판 대장경의 존재를 파악하면서 적지 않은 의문이 남는다. 츠츠의 토박이인 아비류(阿比留)가의 가계도를 분석한 결과를 소개하면 일본의 기본적 사회조직이 드러난다. 성씨계승의 남계원리가 기본이었지만, 양자제도가 발달했다. '요신(養子)' '무코요시(壻養子)' '토리무코토리요메(取壻取嫁)'의 세 가지 방식인데, 전형적인 것은 토리무코토리요메였다. 양자를 들이는 집의 남편 쪽 집안에서 '사위'를, 부인 쪽 집안에서 '며느리'를 데려와서 둘을 혼인시켜서 '이에'(家·집)를 계승하게 한다. 일본 사회는 혈통보다는 집이 기본이라는 증거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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