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에, 위로 '한 병' 팝니다"..도덕 선생님, 와인셀러로 '완벽한 전향'

파이낸셜뉴스       2026.01.18 07:00   수정 : 2026.01.18 07:00기사원문
[교사에서 와인 셀러로.. 신영숙씨 이야기]
34년 동안 윤리 교사로 재직, 정년퇴임 후 '낯선 길로'
"가르치는 것과 파는 것, 본질은 결국 '소통'이더군요“



[파이낸셜뉴스] 학교 종이 울리면 교단에 서고, 아이들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던 시간이 무려 34년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표, 익숙한 교과서, 그리고 ‘윤리 선생님’이라는 단정한 호칭. 그 견고한 세계를 제 발로 걸어 나온 신영숙씨(67)가 선택한 두 번째 세계는 뜻밖에도 알코올 향기 감도는 ‘와인 매장’이었습니다.

“술은 1년에 한 잔도 안 마셔요. 그런 제가 와인을 판다고 하니 다들 놀라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교실보다 이곳에서 더 많은 대화가 오간다는 걸요.”

신씨는 지난해 2월 정년퇴임 후, 서울시니어일자리지원센터의 ‘잡챌린지’ 프로그램을 통해 와인 셀러로 변신했습니다.

평생 모범생처럼 살아온 그가 낯선 와인 병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은 새로운 맛이 아니라, 새로운 ‘나’였습니다.

34년의 울타리 밖, 벌판에 홀로 서다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신씨는 학교 다닐 때에는 수업 시간에 손 한 번 못 드는 수줍음 많은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해내는 당찬 성격이기도 했죠. 1980년대 후반, 무주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뒤 34년 동안 교실을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돌이켜 보면 34년이라는 세월은 아득할 만큼 길었습니다. 비가 오면 개울이 불어 산을 넘어 등교하던 아이들이 있던 시절부터 스마트폰에 빠져 옆 짝꿍 이름도 모르는 지금의 아이들까지, 그야말로 학교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신씨는 지난해 2월, 길었던 교직 생활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정년퇴임의 순간 찾아온 감정은 ‘시원섭섭함’보다는 ‘막막함’이었죠.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는 순간,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어요. 매달 나오던 월급도, 의논할 동료도 없는 벌판에 홀로 선 기분이었죠.”

교사 생활은 끝났지만 아직 남은 날은 많았기에, 신씨는 곧바로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많은 퇴직 교사들이 선택하는 방과 후 교사나 사회복지 분야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보다 가슴 뛰는 ‘새로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운명처럼 20년 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2005년쯤, 펜싱을 배우다 알게 된 지인과의 식사 자리였어요. 그때 추천받은 만화 '신의 물방울'과 와인의 낯선 분위기가 참 강렬하게 남았었나 봐요. 만화는 중간까지 읽다가 그만뒀지만, 퇴직 후 시니어 일자리 공고를 살펴보다가 ‘와인 셀러’를 보자마자 이거 재밌겠다 싶더라고요.”

"와인 맛은 상상으로… 진심은 덤으로"




도전은 시작부터 난관이었습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시니어일자리지원센터의 '잡챌린지' 경쟁이 생각보다 훨씬 치열했기 때문이죠. 신씨는 "우리가 ‘베이비부머’ 세대라서 그런지 어디서나 경쟁이 치열하더라"며 웃었습니다. 서류 전형부터 면접까지 합격해야 '시니어 전문셀러 양성과정'을 수강할 수 있었는데, 전직 은행 지점장부터 레스토랑 경영자까지 쟁쟁한 경쟁자들이 면접장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쟁을 뚫고 이 과정에 합격해 '와인 셀러'에 도전할 자격을 얻은 신씨에게는 다른 고민이 생겼죠.

“평소 많이 먹어봐야 술~술~ 설명이 나올 텐데,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보니 처음엔 손님을 맞이할 때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은 와인 셀러로 취업을 기다리는 입장이지만, 정직원이 되면 아마 술을 다 마셔보고 손님들이 원하는 맛을 찾아갈 수 있도록 더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맛이라는 건 취향의 문제다 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맛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한국사람 입맛엔 맵고 짠 음식이 맞으니 호주나 칠레산 신대륙 와인이 맞겠다 싶어 공부하고, 인턴십 때 매장에서 근무하며 손님들의 반응을 데이터처럼 머리에 쌓았어요.”

그의 진심이 통한 걸까요. 서울 강서구의 한 대형마트 와인 코너에서 근무하던 시절, 신씨는 꽤 좋은 실적을 냈고 채용 권유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매니저와 함께 ‘완판’을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하던 짜릿함은 교직 생활과는 또 다른 성취감이었다”고 돌이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와인 셀러’라는 일이 단순히 술 한 병을 판매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위로를 건네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달았고요.

다시 뛰는 심장, 새로운 꿈의 '숙성'을 시작하다


“요즘 교실은 소통이 단절됐어요. 1년 내내 함께 학교를 다녀도 자기 반 친구 이름을 끝까지 모르는 아이도 있고, 밥 먹을 친구가 없어 점심을 굶는 아이가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매장에선 손님들이 먼저 말을 걸어와요.”



신씨는 와인 매장에서 비로소 ‘대화의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말합니다. 최근 학교 현장은 아이들이 1년 내내 옆 친구와 말 한마디 안 할 정도로 삭막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빠 손을 잡고 온 꼬마 손님이 그에게 건넨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하네요.

“아이에게 '아빠가 와인을 좋아하나 봐' 하고 말을 걸었죠. 그랬더니 ‘아빠보다 엄마가 와인을 더 좋아해요. 그런데 엄마는 와인보다 저를 더 좋아해요’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 말이 어찌나 예쁘던지…. 학생과 교사 사이에는 아무래도 간격이 좀 있는데, 이곳에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웃게 되더라고요.”

평생 자신이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던 신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낯선 사람에게 와인을 권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했습니다. 인턴십은 끝났지만 신씨의 꿈은 이제 본격적으로 숙성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죠. 여행이라면 질색하던 신씨는 이제는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를 꿈꿉니다. 기회가 된다면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서 시니어들을 위한 와인 강사로도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좀 쉬지 그러냐’고 하지만, 저는 일이 주는 생동감이 좋아요.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인터뷰 말미, 그는 은퇴를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이들에게 담백한 조언을 건넸습니다.

“저도 대단한 결심을 한 게 아니에요. 실업자 신고하러 갔다가 시니어클럽 문자를 받고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에 그냥 부딪혀본 거죠. 30년 넘게 한 가지 일만 했다고 해서 나머지도 그 연장선일 필요는 없잖아요. 일단 문을 두드려보세요. 생각보다 재밌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교실이라는 네모난 세상에서 나와, 와인이라는 둥글고 향기로운 세상으로. 신영숙씨의 인생 2막은 이제 막 코르크 마개를 땄을 뿐입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의 1막을 뒤로하고, 2막의 문을 연 사람들을 만납니다. 안정된 과거 대신 가슴 뛰는 불확실성을 택한 이들의 선택은 우리에게 '늦은 때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직업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고쳐 쓰며 마침내 또 다른 나를 발견한 사람들. [괜찮아, 다시 인생]이 전하는 다채로운 삶의 궤적이 당신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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