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의(鍼醫) 신가귀는 효종의 죽음으로 결국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파이낸셜뉴스
2026.01.24 06:00
수정 : 2026.01.24 09:01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옛날 신가귀(申可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침술에 능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신가귀는 아침 식사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젓가락으로 나물을 한꼬집 집어들어 올리려는데, 손과 함께 젓가락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다. 침의가 손을 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가귀는 가족들이 볼까 두려워 식사를 멈췄다. 아뿔싸. 신가귀에게 수전증이 생긴 것이다.
효종 9년 여름, 효종은 무더운 날씨에 오른쪽 다리에 난 상처 부위에 침을 맞았는데, 침자리가 잘 아물지를 않았다. 상처 부위를 굽혔다 폈다 하는 것도 차도가 없었다. 효종은 소갈병(消渴病,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도 잘 생기고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음력 11월 17일. 효종은 왼쪽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근육이 늘어져 제대로 걷지 못하는 증상까지 생겼다. 신가귀가 임금의 오른쪽 발가락 사이의 팔풍혈(八風穴) 혈자리 4곳에 침을 놓았다. 그때 옆에 있던 의관 유후성이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신가귀가 침을 놓으면서 손을 떠는 것을 본 것이다.
효종 10년 음력 3월 26일. 효종의 다리에 힘이 빠지는 증상은 봄이 되어서도 완전하게 낫지를 않았다. 의관들이 침을 놓을 지를 상의했지만 침보다는 약물치료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중지를 모았다. 사실 침치료는 할 만큼 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효종 10년 음력 4월 27일, 효종은 오른쪽 관자놀이와 머리카락이 나는 부위에 생긴 종기가 심해졌다. 이날 약방 의관들이 들어와서 진찰하였는데, 종기의 독이 얼굴에 두루 퍼져 효종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종기가 난 부위에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사실 이 종기는 한참 전에 생긴 것이다. 전에 이를 진찰한 의관 유후성은 “주상의 증상은 단지 작은 종기에 불과합니다.”라고 했다. 때문에 효종은 의관들의 약방문을 받지 않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에도 뒤통수에 난 종기가 저절로 사그라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기우제를 지내다가 종기의 증세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다.
의관 유후성이 진찰해 보더니 “종기의 독기가 눈 주위에 모여 있으니 마땅히 산침(散鍼)을 놓아서 빼내야 합니다.”라고 했다. 산침이란 혈자리에 구애받지 않고 병소에 집중적이면서도 산발적으로 침을 놓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한 명의 침의가 몇 차례에 걸쳐 산침을 놓았다.
효종 10년 음력 5월 3일. 그날까지도 효종은 오른쪽 눈언저리에 산침을 맞았다. 저녁에 약방 의관들이 들어와 진맥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자 효종은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종기 증후의 경중을 말하라.”라고 했다. 그러나 의관들이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효종은 짜증을 내며 “모두 물러가라!”하고 명하였다.
다음 날 음력 5월 4일 아침, 효종이 의관의 정제도 거치기 전에 침소에서 일어나자마자 약방 도제조 원두표,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 등과 함께 의관 유후성도 입시했다. 그때 신가귀는 몸에 병이 있어 집에 있었으나, 신가귀 또한 바로 입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신가귀가 입시하자, 효종은 유독 신가귀에게 “지금 침을 맞는 것은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신가귀는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膿)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파종(破腫)하는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의관 유후성이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하고 했다. 유후성은 지금의 병증에 침을 놓는 것에 대한 부작용과 함께 신가귀가 수전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염려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왕세자(훗날 현종)가 “아바마마, 아침 수라를 드시고 침치료를 받는 것이 어떠신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효종은 “그럴 필요없다. 신가귀는 바로 침을 잡도록 하라”하고 명했다. 효종은 이미 신가귀가 중병을 앓고 있고, 거기에다가 수전증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가귀에게 침을 잡도록 한 것을 보면 그를 그만큼 신뢰했던 것이다. 유후성은 어명이기에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신가귀는 오른쪽 관자놀이의 종기에 종기침을 깊게 놓아서 터뜨렸다. 파종침(破腫針)을 맞고 나자 농즙처럼 보이는 것이 한 숟가락 정도 나오더니, 이후 검붉은 피가 계속해 샘솟듯이 쏟아져 나왔다. 효종은 이를 보고 병소의 독이 빠져나오는 것으로 여겨서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라고 했다.
그런데 출혈이 그치지 않았다. 신가귀의 침이 아마도 혈락(血絡)을 찌른 듯했다. 관자놀이 부위의 측두동맥이 손상된 것이다. 출혈은 심장이 뛸 때마다 박자에 맞춰서 옹달샘처럼 솟아 올라왔다.
한 의관이 겹겹이 접힌 명주천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효종의 출혈부위를 압박했다. 명주천과 옷은 피로 물들었다.
그 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혈갈(血竭)이 급하니, 가루로 만들어 곧바로 들이라.” 이어서 “이 밖에도 석회말, 혈갈말, 자단향말, 괴화말, 백초상말, 와분말을 삼제조가 감독하여 조제하고, 끊임없이 연속해서 들이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들 약제는 모두 지혈제들이었다. 모두들 당황하는 상황 속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는지 알 수 없었다. 궁녀들은 옆에서 울음을 터드렸다.
의관들은 계속해서 지혈제를 발랐으나 피가 그치지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가귀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약방에서 입시한 의관에 의해서 진피죽여탕, 독삼탕이 진어되었다. 효종은 독삼탕을 마시고서는 약간 안정이 되자 “의관들은 동요하지 말라.”라고 했다. 그러나 의관 유후성이 “상의 환후가 매우 위급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청심원, 죽력, 생강즙이 연이어 들어왔다.
효종의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피는 새하얀 홑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미 흘러내린 피는 방에서 흥건하게 고여 선지처럼 굳어갔다. 효종은 큰 숨을 몰아쉬며 곁에서 눈물을 흘리는 왕세자에게 나지막이 “파종(破腫)은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했다. 그 이후 옥음(玉音)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모두들 엎드려 곡을 했다.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왕세자가 침상 아래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내관이 옆에서 부축하여 밖으로 나왔다. 효종은 결국 그날 오전 그렇게 승하했다.
침을 잡았던 신가귀와 당시 입시했던 모든 의관들은 의금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효종의 장례를 마치고 현종이 왕으로 즉위하고서도 신가귀 등에 대한 죄를 묻는 청이 물밀듯이 이어졌다. 특히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는 상태로 침을 놓았다고 해서 중죄인 취급을 받았다. 신가귀에 대해서는 양인(良人)의 신분을 박탈하고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판결이 이미 내려졌다. 그러나 현종은 신가귀에게 죄를 묻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현종이 신가귀 등의 처벌을 미루는 이유가 있었다. 선왕이 신가귀에 대한 믿음에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왕은 전년(前年)에도 낙상으로 인하여 볼기에 종기를 앓아 신가귀에게 침을 놓게 해서 효과를 보았는데, 그때마다 효종은 항상 “신가귀는 침을 잘 놓는다.”라고 칭찬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현종은 선왕이 신가귀의 침을 맞을 당시 항상 왕세자의 신분으로 항상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선왕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신가귀의 파종침을 맞고 선왕이 사망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또한 파종침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지켜봤다. 이는 의관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대오과실(大誤過失)이었다. 신가귀는 결국 교형(絞刑, 교수형)을 면치 못하였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조선왕조실록>〇 효종 10년 5월 4일. 藥房都提調元斗杓, 提調洪命夏, 都承旨趙珩等入侍于大造殿楹外, 醫官柳後聖, 申可貴等,【時可貴病在家, 是日力疾詣閤門外, 遂命入侍.】 先進於榻前. 上問受鍼當否於申可貴, 可貴對曰: "腫毒流注於面部, 亦將成膿, 必須受鍼出惡血, 然後可以收效矣", 柳後聖以爲: "不可輕試." 王世子力請進水剌後, 更議受鍼, 上却之. 命可貴執鍼, 仍令提調一人入侍, 都提調元斗杓先入殿內, 提調洪命夏, 都承旨趙珩追後直入. 上已受鍼, 血出鍼穴, 上曰: "微可貴, 病幾危矣." 血湧不止, 蓋鍼犯血絡. 命提調以下退出, 促進血竭等藥以塗之, 猶不止, 提調及醫官等, 罔知所爲. 上候漸向危急, 藥房進淸心元獨參湯. 百官驚遑咸會于閤門外, 俄而上命召三公及宋時烈, 宋浚吉藥房提調, 承旨, 史官及諸臣, 卽趨入, 伏于御床下, 上已大漸, 王世子號擗於楹外. 時已午矣. (약방 도제조 원두표,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 등이 대조전의 영외에 입시하고 의관 유후성, 신가귀 등은【이때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이날 병을 무릅쓰고 궐문 밖에 나아가니, 드디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먼저 탑전에 나아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고,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 제조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라고 하니, 도제조 원두표가 먼저 전내로 들어가고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이 뒤따라 곧바로 들어갔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과 독삼탕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과 송시열, 송준길,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 사관과 제신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에서 오시 사이였다.)
○ 현종 즉위년 6월 2일. 上下敎院相曰: "申可貴上年之功, 不可忘. 斬與絞其死一也, 欲令處絞如何?" 太和對曰: "上, 若念前功, 則雖絞, 亦無所妨." 上遂命申可貴處絞. 兩司又爭之, 不許. (상이 원상에게 하교하기를, "신가귀의 작년 공로는 잊을 수가 없다. 참이나 교나 죽는 것은 일반이지만 교로 처결했으면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상께서 만약 전공을 생각하신다면 교로 처결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드디어 신가귀를 교로 처결할 것을 명하였다. 양사가 또 다투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〇 현종 즉위년 6월 4일. 兩司連啓柳後聖等事, 且請收申可貴處絞之命, 亟正邦刑. 上答曰: "絞與斬, 殺則同也, 所以不斬, 體先王之志也. 且爾等雖以可貴執鍼之際, 後聖等知其病久手戰, 而不勸止, 爲其大罪, 前年破腫時, 可貴固無病, 而亦手戰. 此乃先王所洞燭也. 居常稱其善下鍼, 後聞病重濱死, 屢發憐惜之言. 其日使之執鍼, 蓋以此也. 醫官旣退, 孤從傍瞻仰頭部, 心神錯亂, 不覺涕泣. 先王顧謂曰: ‘破腫爲求生也, 何爲泣也?’ 到今思之, 痛哭而已, 雖後聖百人, 何敢有言於其間乎? 후략.” (양사가 유후성 등의 일로 연달아 아뢰고 또 신가귀를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을 거두어 달라 청하며 속히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자, 상이 답하여 말하였다. “교수형과 참형은 죽이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참형으로 하지 않은 것은 선왕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다. 또 그대들은 비록 가귀가 침을 잡았을 당시 후성 등이 그가 오랫동안 병을 앓아 손이 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려서 그만두게 하지 않은 것을 큰 죄로 삼고 있으나 전년에 파종할 때에도 가귀는 참으로 병은 없었으되 역시 손이 떨렸으니 이는 곧 선왕께서 이미 훤히 꿰뚫어 알고 계시던 일이다. 평소에 늘 그가 침을 잘 놓는다고 칭찬하셨고 뒤에 병이 깊어 거의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여러 차례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을 하셨으니 그날 그로 하여금 침을 잡게 한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다. 의관들이 물러간 뒤 내가 곁에서 머리 쪽을 우러러보니 마음과 정신이 어지러워져 눈물이 흐르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고 선왕께서 돌아보시며 ‘파종은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느냐’고 하셨다. 지금에 와서 이를 생각하면 그저 통곡할 뿐이며 비록 후성이 백 명 있다 한들 누가 감히 그 사이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후략.”)
○ 현종 즉위년 6월 10일. 罪人醫官申可貴處絞. (죄인인 의관 신가귀를 교형에 처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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