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례 없는 입법 인질극...트럼프, 508조 '선불 투자'에 법적 대못 박나

파이낸셜뉴스       2026.01.27 10:36   수정 : 2026.01.27 10:36기사원문
"너희 국회 때문이야" 트럼프의 보복
500조원 안 내놓으면 車 관세 25%
자동차 지키려다 방위비 10배·LNG 강매까지 줄줄이 '독소 청구서'



[파이낸셜뉴스] 미국이 한국 국회의 입법 절차를 문제 삼아 관세를 다시 올렸다. 행정명령으로 관세를 낮춰놓고도 약속한 3500억달러(약508조원) 투자 구상이 법률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세 25% 환원을 전격 선언한 것이다. 타국 의회의 판단을 무역 합의 이행의 조건으로 삼은 이례적 조치다.

이번 압박은 단순한 통상 마찰을 넘어 한국 자본과 정책 선택을 미국 공급망에 구조적으로 묶어두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또 상식 뒤집은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한국 국회의 비준 지연'을 명분 삼아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25%로 다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이 합의한 15% 관세율을 시행 두 달 만에 뒤집은 것이다. 트럼프는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미국은 행정명령으로 관세를 즉각 낮췄는데 왜 한국 국회는 약속한 대미 투자법을 처리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우리(미국)는 줄 것을 줬는데 너희(한국)는 왜 안 주느냐'는 프레임은 미국 내 지지자들에게 트럼프를 유능한 협상가로 각인시키는 동시에, 한국 정부에는 외교적·정치적 항복을 강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번 사안의 핵심은 관세 인상 자체보다 그 근거에 있다. 미국은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이 국회에서 법률 형태로 처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관세를 다시 25% 수준으로 환원했다. 그러나 통상 협상에서 투자 약속은 보통 양해각서(MOU)나 정책 선언으로 이뤄진다. 상대국의 입법 일정과 정치 지형은 협상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간주돼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이 한국 국회의 비준 여부를 문제 삼은 것은 기존 통상 관행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미국 행정부는 행정명령을 통해 관세를 즉각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관세 인하 조치를 무효로 주장하면서 책임을 한국 국회의 입법 절차로 돌린 것은 합의 이행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재설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관세라는 수단을 활용해 타국의 입법부를 직접 압박한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여서 이번 조치는 정치적 압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내부의 여야 정쟁과 법안 처리 지연이 결과적으로 미국 측에 '약속 불이행'의 공격 명분을 제공한 구조라는 점도 주목된다. 이 같은 방식이 용인될 경우 향후 통상 협상은 한층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 행정부 간 합의가 의회 비준 여부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통상 문제를 외교·안보·정치 전반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정권 바뀌어도 법적 족쇄로 '대못'


이번 압박의 성격을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불가역성에서 찾는 시각도 적지 않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대미투자특별법)'은 단순한 투자 이행이 아니라 법률을 통한 구조적 결속이다.

정부 간의 MOU는 정권 교체에 따라 흔들릴 수 있지만 국회를 통과한 법률은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쉽게 되돌릴 수 없다. 이는 한국 자본과 산업 전략을 미국 공급망에 장기적으로 묶어두려는 '대못 박기'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이미 반도체, 배터리, 방산, 에너지 등 전략 산업에서 동맹국 자본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지속해 왔다. 여기에 더해 이번에는 투자 약속을 국내법으로 고정시키는 단계로 나아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의 정책 선택 여지를 구조적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관세 압박은 이 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은 쿠팡 등 미국계 기업에 대한 규제를 비관세 장벽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상 문제로 전환하고 있다.
여기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확대 등까지 묶은 포괄적 패키지 딜 구상이 거론된다.

이번 사태는 한미 동맹이 '가치 중심의 혈맹'에서 철저히 숫자로만 증명되는 '현금 결제형 동맹'으로 강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세, 투자, 안보, 에너지가 하나의 거래 묶음으로 제시되면서 동맹국의 선택지는 줄어드는 구조로, 한국 역시 통상 문제를 경제 부처 차원의 협상으로만 다루기 어려운 영역이 되고 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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