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민주주의’가 썩고 있다
파이낸셜뉴스
2026.02.02 18:33
수정 : 2026.02.02 19:33기사원문
"지방자치·선거판 타락 요지경
강선우·김병기 녹음서 드러난
김경 시의원 사례는 빙산 일각
돈 줘 공천 받고 이권 개입하는
폐습 끊으려면 정당공천 막든
당별로 투명한 예비경선 해야"
범야권은 한동훈 전 대표 제명 후 국민의힘 내홍으로 후보 난립 조짐이다. 그 와중에 최근 서울시 의원 공천헌금 수수 의혹으로 강선우 의원과 김병기 원내대표가 민주당을 탈당했다. 가히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정치판 풍경이다.
지방자치의 맨살을 드러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건가. 민주당 소속 김경 서울시 의원이 얼마 전 사퇴했다. 강선우 의원에게 2022년 지방선거 공천 때 1억원을 줬다는 녹음이 공개된 지 28일 만이다. 강선우와의 대화 녹음 당사자 김병기도 구설에 올랐다. 그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인 동작구 구의원들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가 돌려줬다는 의혹을 담은 탄원서가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으면서다.
그런데도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공천헌금 의혹'에 대해 "'시스템 에러'라기보다는 '휴먼 에러'에 가깝다"고 했다. 금품수수 의혹은 개인의 일탈일 뿐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다분히 강선우·김병기 선에서 꼬리를 자르려는 인상을 준다. 총선·지방선거 등 당 공천 시스템 전반의 문제로 번지는 걸 막으려는 수순으로 비친다는 얘기다. 야당이 제기한 공천헌금 특검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더군다나 김경이 2023년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당 현역 의원측 관련자들과 통화한 녹음파일이 발견됐다. 경찰이 서울시의회에서 임의 제출받은 PC에서 찾아낸 파일 120여개다. 그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지 현재로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여권 실세들에게 공천헌금을 전달하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담겼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지방자치가 중앙정치 못잖게 도둑정치(kleptocracy)의 무대로 전락 중이란 뜻이다.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는 징후라면 자못 심각하다. 지방자치제는 지난 1995년 부활했다. 소수 기득권층이 다수 민초들을 지배하는 엘리트주의 대신 보통 사람들이 참여해 지역 공동체를 돌봐야 한다는 명분과 함께.
그러나 본뜻과 달리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와 유착해 점점 부패의 온상이 돼 가고 있다. 지방의원들이 공천을 위해 뇌물을 주고 지방의회에서 본전 이상을 건지려고 각종 이권에 손대는 일도 적잖이 빚어졌다. 서울시가 김경이 시의회 상임위를 옮길 때마다 가족 회사가 산하기관 사업을 따낸 정황을 파악, 감사에 들어간 데서 보듯이.
여야는 벌써 단체장을 한 석이라도 더 차지하고, 지방의원 의석 다수를 점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국리민복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그렇다면 6·3 선거 전에 30년간 반복·누적된 악순환의 고리부터 끊어내는 게 급선무다.
그런 맥락에서 우선 지방선거판이 공급과잉 시장이 된 배경을 직시해야 한다. 출범 당시 지방의원은 회의 수당만 받는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다만 봉사하는 자리라 겸직은 허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겸직금지 직종을 뺀 생업을 가져도 고액의 의정활동비·월정 수당(광역의원은 7000만원 상회)을 보장받는다. 게다가 이권 개입을 막는 시스템도 부실하다. 그러니 달콤한 꽃대에 진딧물 꾀듯 출마자가 넘쳐난다. 그래서 기초의원의 경우 무보수 명예직으로 환원하는 방안도 고려해봄 직하다. 미국 일부 주 지방의원이 그렇듯이.
더 큰 과제는 혼탁한 윗물(중앙정치)이 아랫물(지방정치)을 오염시키는 것을 차단하는 일이다. 국회의원들이 지방의원으로부터 공천헌금을 받고 각종 선거에서 수족처럼 부리는 악습을 걷어내란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광역의원 정당공천제 폐지가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국회의원들의 지방선거 후보 공천 개입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각 당별로 지방선거 후보 선발 시 완전 예비경선제를 채택하는 게 차선의 대안이 될 수 있을 법하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77@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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