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은 포기했다"…엔저가 바꾼 휴가 지도, 일본은 언제까지 쌀까

파이낸셜뉴스       2026.02.03 14:46   수정 : 2026.02.03 14:46기사원문
100엔=900원대 일상이 된 '싼 일본', 유통기한은
일본은 '엔저 브레이크' 밟긴 밟았다는데...
엔저는 미국 손에? 왜?



[파이낸셜뉴스] "미국이나 유럽 여행은 비행기 표 값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결국 올해 휴가도 만만한 일본이다!"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흔히 들리는 말이다.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풍경이나 음식이 아니라 환율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00엔당 900원대 초반 환율이 1년 이상 이어지는 것은 최근 10여년을 통틀어도 흔치 않은 '초특가' 구간이다. 하지만 외환시장에서는 이 엔저(엔화가치 하락)를 일본의 새 기본값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이 걸려도 오르긴 올라 결국 1000원을 회복할 것이란 중론이다. 이른바 '킹달러' '킹유로' 시대에 우리가 누리는 고마운 엔저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남은 것일까.

"100년 동안 팔겠다"… 우에다의 '안전 운전' 전략


일본은행은 1월 말 기준 장부가로 상장지수펀드(ETF) 37조1808억엔(약 347조원), 부동산투자신탁(REIT) 6547억엔을 보유하고 있다. 시가 기준으로는 ETF만 무려 83조2000억엔에 달한다.

일본은행은 이미 아베노믹스의 유산인 ETF 매각에 착수하며 '돈 풀기 시대'의 퇴장을 예고했다. ETF·REIT의 신규 매입을 중단했고, 2024년 9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연간 ETF 3300억엔, REIT 50억엔씩 처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실제로 지난 1월 일본은행은 이 중 ETF 53억엔, REIT 1억엔을 매각했다. 전체 보유액 대비 0.02% 수준으로 숫자만 보면 찔끔이지만 시장에 분명한 신호를 낸 것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회견에서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부 처분하는 데 단순 계산으로 10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대차대조표상 숫자는 바뀌기 시작했지만 시장을 뒤흔들기엔 아직 체급이 너무 작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엔저에 브레이크를 걸되 급브레이크는 밟지 않는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당장 엔화를 강하게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엔저를 영구히 방치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다.

"900원 초반은 불편"… 일본의 숨은 '마지노선'


일본 정부의 대응 역시 엔저의 하단을 지지하는 변수다. 일본은 2024년 외환시장 개입에 약 9조8000억엔을 투입했다. 특히 4월 한 달에만 하루 최대 약 5조9000억엔을 쏟아붓는 '물량 공세'를 폈다. 당시 달러·엔 환율은 160엔 안팎, 원·엔으로 환산하면 100엔당 930~940원대였다.

일본 재무성 고위 관계자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환율의 수준보다 속도와 변동성이 문제"라며 "과도한 움직임에는 적절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장은 이를 '빨리 떨어지면 개입, 천천히 내려가면 관망'으로 해석한다. 결과적으로 900원대 초반 환율은 일본 정부가 체감하는 '불편선'에 가까워졌으며 바닥을 더 깊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결국 리모컨은 미국에"… 2027년 1000원 회복 시나리오


엔저를 지탱해온 가장 강력한 힘은 여전히 미국 금리다. 일본의 정책금리는 인상 이후에도 1% 미만인 반면, 미국은 고금리 기조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제 시장의 초점은 "인하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하느냐"로 옮겨갔다.

무엇보다 '약달러'를 선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금리 인하 압박과 곧 윤곽을 드러낼 차기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의 성향은 엔화 반등의 강력한 촉매제다. 트럼프는 강력한 저금리 기조를 강조하며 달러 가치를 낮추겠다고 공언하고 있어 이는 곧 엔화 강세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미국 금리 인하가 가시화되면 달러·엔 환율은 중기적으로 하락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UBS 역시 "BOJ의 점진적 정상화와 미국 금리 인하가 맞물리는 시점이 엔화 반등의 출발점"이라고 내다봤다.

대체로 시장은 2027년 전후로 950~980원대 복귀를 1차 목표로 보고, 이후 정책 정상화가 이어질 경우 2027~2028년께 원·엔 1000원 선 회복 가능성을 중장기 경로로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엔저를 즐겨야 하는 이유


결론적으로 지금의 엔저는 일본 경제의 새 기준이라기보다 정책 전환기에서 잠시 붙어 있는 '타임 세일' 가격표에 가깝다. 일본은행은 이미 방향을 틀었고, 정부는 하단을 관리 중이며, 미국의 금리 장벽도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비록 시장의 불만을 살 만큼 속도는 느리지만 일본은행이 시장의 '큰 손 매수자'에서 '판매자'로 포지션을 바꿨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현지 외환 전문가들은 "엔저 여행의 유통기한이 아직은 남아있으나 시장의 계산기는 이미 다음 숫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엔화는 지난해 850원대 저점을 통과해 900원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이제 100엔당 1000원이라는 숫자가 여행 계획표 위로 조용히 복귀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올해까지는 여전히 '가성비 일본'이 유효하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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