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가 졌습니다"… 이 쉬운 한마디가 판결문엔 없다
파이낸셜뉴스
2026.02.11 14:54
수정 : 2026.02.11 16:12기사원문
어려운 판결문 앞에서 멈춘 지적장애인…선고 듣고도 뜻 몰라
2022년 첫 도입된 '이지리드 판결문'…장애인 이해 돕는 도구
예규로 책무 강화됐지만 여전히 '선택'…현장에선 활용 안 돼
법관 교육·전문 인력 필요성 대두…쉬운 판결문 정착 과제로
[파이낸셜뉴스] "피고인이 심한 정도의 지적장애인인 사실이 인정된다. 다만 이 같은 사정이 양형에 유리하게 참작되는 것을 넘어 감경할 정도의 사유로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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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법원에서 벌금 100만원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발달장애인 이모씨(30대·남성)는 판사의 선고를 듣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양형', '참작', '위법성', '충동조절능력' 등 익숙하지 않은 법률 용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는 선고가 끝난 뒤 변호인에게 판결의 의미를 다시 물어봐야 했다.
"이○○씨가 지적장애가 있는 것은 인정되지만, 그 사정만으로 처벌을 가볍게 할 수는 없어 같은 벌을 내립니다."
"이○○씨는 지적장애로 인해 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거나, 욕망을 조절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실수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판결문은 이처럼 조금 더 쉬운 말로도 쓸 수 있다.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작성된 판결문은 '이지리드(Easy-Read)' 판결서라 불린다. 핵심은 단순히 어휘를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재판 당사자인 장애인이 판결의 결론과 이유를 실제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데 있다.
국내에서는 2022년 처음 등장했다. 그해 1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강우찬 부장판사)는 청각장애인 원고가 제기한 장애인 일자리 사업 불합격 처분 취소 소송을 기각하면서, 판결 주문에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문구를 함께 적었다. 판결 이유 서두에는 쉬운 말로 쓴 요약문을 글상자로 제시했고, 장애인 원고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도 포함시켜 주목을 받았다.
쉬운 말 판결문 작성은 법원의 책무로 점차 강조되는 추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선택 사항'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1월 시행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사법접근 및 사법지원에 관한 예규' 제6조는 법원이 생산·배포하는 정보에 대해 쉬운 말 자료를 제공해 동등한 정보 접근을 보장하도록 규정했다. 다만 쉬운 말 판결문 작성 자체를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실제 현장에서도 쉬운 말 판결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해 선고된 지적장애 피고인의 주거침입·성범죄 관련 형사재판 1·2심 판결문 10건을 살펴본 결과, 쉬운 말로 작성된 판결문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대부분 "사물의 시비(是非) 등을 변별(辨別)할 능력이 결여(缺如)된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 등 한자어 중심의 표현이 반복됐다. 지적장애인을 대리하는 한 변호사는 "지능이 7세 수준인 당사자가 법정에 나와 증언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재판부와 상대의 어려운 용어로 된 질문과 절차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점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사건을 다수 맡아온 이수연 법조공익모임 나우 변호사도 "장애인인 피고인이 직접 재판에 출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재판장이 쉬운 말로 설명하지 않아, 재판이 끝나고 변호인이 다시 설명해줘야 한다"며 "예규는 생겼지만 법원마다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어 실효성이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한국어 사용자에게는 한국어 판결문을 주듯, 지적장애인에게는 쉬운 말 판결문이 기본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 안팎에서도 제도 정착을 바라는 목소리는 나온다. 쉬운 말 판결문에 관심이 있는 한 판사는 "후속 판결이 거의 나오지 않아 아쉽다"며 "선고 내용이 징역 3년이면 '내가 감옥에 가서 3년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만큼은 장애인 당사자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정책연구원 역시 지난해 연구보고서에서 대법원 등 주요 법원이 직접 쉬운 말 판결문을 작성·제공할 필요성을 과제로 제시했다. 법관 연수에 쉬운 말 판결문 교육을 포함하고, 업무 부담을 고려해 쉬운 말 문서 작성 전문가를 보조 인력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언급됐다.
반면 예규 제정을 발판 삼아 점차 쉬운 말 판결서를 포함한 친절한 자료 제공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도 있다. 이경혜 한국장애인개발원 원장은 "예규에 다양한 정보제공방식과 인력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내용이 담겼다"며 "예규 제정은 첫걸음이고 이후 사법부가 의지를 갖고 더 지원을 확대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scottchoi15@fnnews.com 최은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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