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엔 가슴 뛰는 일 하세요"...대기업 퇴직하고 '작가'가 된 남자
파이낸셜뉴스
2026.02.14 10:00
수정 : 2026.02.14 13:07기사원문
[25년 대기업 책임에서 예술가로 변신한 윤진수씨 이야기]
50세 되던 해 "공학 예술 하러 떠납니다" 메일 보내고 퇴직
[파이낸셜뉴스] 대기업에서 25년간 전자부품 개발관련 업무를 했던 엔지니어는 이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으로 그림을 그려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소설도 쓰고 피아노도 연주하느라 쉴 틈 없이 바쁜 가운데 인공지능(AI) 대학원까지 다닙니다. 대기업 책임연구원으로 25년을 성실히 일하다, 나이 50에 인생의 시계를 다시 세팅한 윤진수(51)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생활고에 묻혔던 예술 열정, 생존을 위한 대기업 취업
하지만 예술적 재능을 쫒기엔 현실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중학교 당시 교회에 큰 어려움이 생기면서, 작은 상가 건물로 옮겨야 했고, 급기야 고등학교 2학년 때 목사님이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어 지면서 크나큰 생활고를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기초생활 수급자로 보증금 500만원짜리 월세집을 전전하면서, 그는 ‘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죽어라 공부에 매달린 결과, 중학교 때는 반에서 15등 남짓하던 성적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전교 15등까지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지망했던 한양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한 윤 작가는 2001년, 만 25세의 나이로 IT 대기업의 PC 개발연구원으로 입사한 뒤에 지난해 10월에 퇴직 하기까지 꼬박 25년 동안을 성실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낮에는 대기업 ‘윤 책임님’, 밤에는 미대 ‘윤 반장님’
"생계유지를 위해 25년을 달렸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갈증이 있었어요. 업무에 집중하다가도 어느 순간 예술적인 생각이 머리를 치고 들어왔죠. 결국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2017년, 유화를 그리기 위해 취미로 다시 시작한 미술이 결국 불씨가 됐습니다. 전공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공모전을 통해 입상을 하면서 알려졌고 그가 그린 그림은 미술 종사자들에게도 독특하다는 평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죠.
조금씩 미술에 대한 꿈이 커져가고 있을 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우연히 본 홍익대 미술대학원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야간 대학원이긴 했지만 바쁜 직장 생활과 병행할 수 있을까 망설임이 생길 법도 한데, 윤 작가는 거침없이 원서를 넣고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그렇게 그는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밤에는 비대면 수업을 듣는 ‘이중생활’을 시작했죠.
"새벽에 일어나서 한국의 근현대 미술과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주중에는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늦은시간까지 그림을 그렸어요. 대학원 재학 기간인 3년 동안 지각, 결석 한 번 없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5학기 내내 과대표를 맡아 교수님들이 ‘이렇게 성실한 제자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죠."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을 공부하게 된 윤 작가는 우리나라 대가들의 그림을 일하듯, 공부하듯 파고 들어갔습니다. 김환기·김창열·박서보·이우환…한국을 대표하는 거장들에 대해 책을 읽고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연구하고 또 연구했죠. 교수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작가들과 작품세계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는 그를 어느 순간부터 모두 ‘윤 반장’이라고 불렀습니다.
AI 공부하는 예술가… "은퇴 후 골프만 치기엔 인생이 길다"
그의 열정은 국경도 넘었습니다. 2023년에는 뉴욕 타임스퀘어 스크린 24인 기획전에 선정돼 참여했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인전까지 열었죠. 그렇게 쌓인 개인전 횟수만 어느덧 13번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욕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년 전부터 브런치에 연재로 올렸던 소설을 최근 POD(맞춤형 소량출판) 방식을 활용해 출간했고, 전문 연주자들과 '모카 트리오(MoCA Trio)'를 결성해 대전 예술가의 집에서 클래식 연주회를 열면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느긋해진 건 아닙니다. 퇴사 후 그의 시계는 더 빨라졌습니다. 그는 “공학과 예술을 융복합시키기 위한 AI 인공지능 연구가 필요했다”며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에 입학했습니다. 오는 3월부터는 AI·빅데이터 석사 과정을 밟을 예정이라고 하네요.
"많은 분이 은퇴하면 여행 가고 골프 치며 여생을 보내려 해요. 하지만 100세 시대에 50년은 너무 깁니다. 저는 제가 가진 공학적 지식에 예술을 접목해 백남준 선생님처럼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싶어요. 돈이 저를 따라오게 만들어야지, 제가 돈을 쫓아가면 안 되잖아요."
"고민한지 일주일 만에 결정한 퇴직… 두려움보다 설렘이 컸다"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윤 작가와 대화를 이어가며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는 데 두려움은 없었을까. 그러나 그는 "퇴직을 결심하는 데 딱 4일 걸렸다"며 웃었습니다.
"개인전을 위해 2023년 10월 밀라노에서 열흘 정도 체류하는 동안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그때, 내가 언젠가 퇴직을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동안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다녀보지 못했던 외국에서 전시회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로 인해 나의 작품이 좀 더 틀에 갇혀있지 않고 자유로워질 것 같았거든요. 또, 50세가 되면 떠나야겠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25년 동안 한 회사에서 내 모든 걸 쏟아 부었으니 미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회사 밖에서 펼쳐질 세상이 궁금했고, 제가 준비해둔 것들이 있었기에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벽 기상'과 '기록'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윤 작가는 매일 새벽 5시 40분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성경 한 구절을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소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자신의 다이어리나 카톡에 기록하는 거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부터 자신만의 무기를 준비하세요. 그리고 과감하게 문을 열고 나오세요. 생각보다 밖은 춥지 않고, 훨씬 재밌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의 1막을 뒤로하고, 2막의 문을 연 사람들을 만납니다. 안정된 과거 대신 가슴 뛰는 불확실성을 택한 이들의 선택은 우리에게 '늦은 때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직업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고쳐 쓰며 마침내 또 다른 나를 발견한 사람들. [괜찮아, 다시 인생]이 전하는 다채로운 삶의 궤적이 당신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길 기대합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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