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 쓰던 평범한 기자, 이 세계에선 굴비 손질 달인?
파이낸셜뉴스
2026.02.18 18:51
수정 : 2026.02.18 20:00기사원문
대형마트 굴비 판매
첫업무는 상품 진열·가격표 붙이기
매대 돌아다니며 수시점검도 필수
행사 현장에서 직접 굴비도 손질
퇴근 후 손끝 생선 냄새에 뿌듯
역대급 취업난 속에서 아르바이트는 이제 단순한 '용돈벌이'가 아니다. 지난해 기준 구직을 포기하고 숨고르기 중인 '쉬었음' 인구 255만명 시대. 알바는 누군가에게는 내일을 기약하는 가장 절실한 디딤돌이자 사회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다. 이에, 본지는 소비의 최전선인 유통·식품 분야 기업·고객간거래(B2C) 현장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 직업의 실상을 체험하고 생생히 전하는 '잡(JOB)스러운 기자들'을 격주마다 연재한다.
화려한 쇼윈도 뒤편의 백화점부터 원산지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농촌까지, 기자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직업 전선'의 진짜 목소리를 담아낸다.
화려한 쇼윈도 뒤편의 백화점부터 원산지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농촌까지, 기자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직업 전선'의 진짜 목소리를 담아낸다.
"고객님, 굴비 행사입니다. 굴비 행사. 맛 좋고 영양가 많은 굴비 오늘 싸게 드립니다. 20마리를 2만7000원에! 밥도둑 한번 보시고 가세요."
■굴비 한 마리에 담긴 '심리전'
아르바이트생의 마음으로 약속 시간보다 10분 이상 빨리 점포에 도착했다. 하루지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유니폼(앞치마)을 착용하면 준비는 끝났다. 냉장, 냉동고 주변에서 일하는만큼 외투는 필수다.
오늘의 첫 일터는 '설 명절 굴비 선물세트 판매대'. 기자에게 맡겨진 첫 임무는 설 선물 세트 상품을 진열하고 가격표를 부착하는 것이었다.
사수인 최 사원이 시범을 보였다. 번쩍번쩍한 금빛 보자기를 능숙하게 박스에 두르고 그 위에 생선을 올리자 한층 고급스러워 보였다.
가격표도 코팅된 종이를 직접 잘라서 상품과 가격을 중복 확인한다. 사수는 보자기 포장도 주름 하나 없이 매만지고 가격표를 자르는 것조차 기계처럼 깔끔하고 정확했다. 반면, 나는 속도와 정확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결국 결과물은 삐뚤빼둘. 내 맘처럼 안돼 속상했다.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가기 전 알아야 할게 너무 많았다. 수 십가지 굴비 세트의 차이점과 가격을 숙지해야 했다. 고객에게 설명과 추천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요즘은 조기 가격이 워낙 비싸 민어로 만든 굴비도 차례상에 많이 올라간다고 한다. 가격 부담을 느끼는 고객에겐 이런 방향으로 공략하는게 좋다는 팁을 들었다.
이날은 설 선물의 택배 접수 기간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날부터는 현장판매 상품만 진열됐다. 설 당일까지 일주일 정도 남아 아직은 명절 대목치고는 여유로웠다. 하지만 사수의 현란한 말솜씨와 설명에 간간이 발길이 이어졌다. 설명을 듣고 곧바로 커다란 선물세트를 구매하는 고객들도 있었다.
사수는 굴비 선물세트 코너뿐 아니라 소속 회사의 제품이 진열된 냉동포와 굴비 행사 매대도 관리해야 했다. 틈틈이 성에 낀 샘플의 포장을 다시 하고, 각 매대의 진열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하나만 보고 있으면 안 돼요. 여기서 판매를 하면서도 저쪽 매대를 확인하고, 할 일은 없나 체크하면서 계속 왔다갔다 해야 해요."
■퍼포먼스가 매출을 부른다
선물세트 작업에 이어 판촉이 한창인 행사 매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두름(20마리) 단위로 엮여 있는 백굴비를 고객들이 직접 보는 앞에서 풀어 손질했다. 손질이 끝나면 팩에 담아내는 과정은 구매 욕구를 파고드는 '퍼포먼스' 현장이었다. 사수는 굴비를 잡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순식간에 머리, 꼬리, 아래 지느러미를 정리했다. 그 모습이 왠지 멋있게 보여 도전해 보겠다고 자청했다. "꼬리를 너무 자르면 상품성이 떨어지니까 적당히 남겨두는 게 포인트"라는 사수의 설명이 뒤따랐다. 의외로 굴비 손질은 적성에 맞았다. 삐죽삐죽 거친 생김새의 굴비들이 손끝에서 깔끔하게 변해가는 걸 보니 묘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두세 두름을 정리한 후부터 요령도 생기자 속도도 붙었다.
퍼포먼스의 효과는 확실했다. 카트를 끌고 지나가다 발길을 멈추는 손님들로 어느새 둘러싸였다. "지금 다듬고 있는 걸로 주세요"라는 고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수는 역시 능수능란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멘트를 자유자재로 바꾸며 현란한 영업 기술을 발휘했다. 기자가 굴비를 손질하는 걸 신기하게 보는 손님들에게는 "직업체험하러 온 젊은 기자님이 다듬어주신다"는 멘트를 던졌다. 고객 몇 분은 '딸 같아서' 애처로웠는지 구매하기도 했다.
■끝내 속삭이고 만 '영업 멘트'
체험을 할수록 가장 어려웠던 건 판촉 멘트였다. "기왕 온 거 기자님도 한번 해보세요"라며 사수는 제안했다.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하지만, 끝내 입밖으로 나온 건 "굴비 할인하고 있습니다~"라는 소심한 한마디였다.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끝내고 사수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식당 음식과 사수가 직접 싸 온 반찬과 샐러드는 입맛에 딱 맞았다. 서툰 업무에 쭉 빠졌던 기력도 보충되는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굴비 다듬기에 들어갔다. 그새 익숙해졌는지 시간이 금세 흘렀다. "기자님 이제 갈 시간이에요"라는 사수의 말이 들렸다. 마지막으로 다듬던 굴비 두름을 마무리짓고 싶어 조금 더 하겠다고 부탁했다. 마지막 굴비들을 깔끔하게 정돈해 매대에 올려두고 '작업 전후' 사진을 찍었다. 끝으로 사수에게 감사를 전하고 유니폼을 반납했지만 발길을 떼기가 아쉬웠다. 간만에 느낀 따뜻한 분위기와 현장의 성취감 때문인 것 같았다.
퇴근을 하고도 한 동안 손끝에 남은 굴비 냄새가 묘하게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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