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리더가 뛸수록, 조직은 약해진다
파이낸셜뉴스
2026.03.08 09:00
수정 : 2026.03.08 09: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올해 한국 재계의 신년은 유독 분주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새해 첫 출근일, 전 계열사 사장단을 직접 불러 모아 3시간에 걸쳐 AI 전환 전략을 논의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10일간 중국·미국·인도를 쉬지 않고 누볐다.
이 두 장면은 한국 재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전문경영인 부회장단이 전면에 나서던 시대가 조용히 저물고, 오너가 직접 경영을 챙기는 구조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분석한 2026년 10대 그룹 신년사에서 'AI'는 44회 언급되며 압도적 1위를 기록했고, '변화'와 '도전'이 뒤를 이었다. 반면 지난해 상위권이던 '미래'와 '가치'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기업들은 이제 전망보다 실행, 경쟁보다 적응을 말하기 시작했다. 언어가 바뀌었다는 것은 경영의 무게중심이 바뀌었다는 신호다.
표면적으로 이 변화는 납득이 간다. AI 시대, 기술 변화의 속도는 예측을 무력화한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환경에서 의사결정을 빠르게 가져가려면 중간 완충층을 걷어내는 것이 효율적으로 보인다. 오너가 직접 현장을 뛰는 모습은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러나 리더십 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면, 경고등이 보인다.
과거 한국 대기업의 리더십 구조는 세 층위로 작동했다. 오너가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부회장단이 전략을 조율하며, 사업부 대표가 현장을 실행하는 구조였다. 이것은 단순한 위계가 아니었다. 리스크를 분산하고, 특정 리더의 판단 오류가 조직 전체로 전파되는 것을 막는 완충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중간층이 얇아지고 있다. 오너가 전략을 직접 챙기고 현장까지 뛰는 구조에서, 조직 내부의 자율적 판단은 설 자리를 잃는다. 보고는 늘어나고, 실행은 위만 바라보게 된다. 구성원들은 스스로 결정하는 대신 회장의 다음 한마디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조직심리학자 에드거 샤인(Edgar Schein)은 리더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조직 문화의 설계자여야 한다고. 그런데 정의선 회장이 10일간 3개국을 누비며 현장을 직접 점검할 때, 그 회장이 동시에 수만 명 직원의 심리적 안전감까지 설계할 수 있을까? 이재용 회장이 사장단 만찬에서 AI 전략을 직접 챙길 때, 그 에너지가 조직 문화의 세밀한 설계까지 닿을 수 있을까? 리더가 모든 것을 직접 챙길수록, 조직 구성원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간다. 이것이 오너 직접 경영이 품고 있는 역설이다.
회장이 직접 뛰어야 하는 조직은 둘 중 하나다. 회장의 판단이 조직 전체의 판단보다 탁월하거나, 조직의 자생적 시스템이 아직 작동하지 않거나다. 전자라면 지금의 질주는 기회다. 그러나 후자라면 위기의 신호다. 지금 한국 재계가 어느 쪽인지, 아직은 단정하기 이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오너가 전면에 나설수록, 조직 내부의 자율성과 판단 시스템은 더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리더의 헌신이 조직의 의존으로 굳어지는 순간, 강한 리더는 오히려 조직을 약하게 만드는 역설에 빠진다.
신년사의 언어가 'AI·변화·도전'으로 채워졌다면, 그 말들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회장 없이도 조직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구조. 진짜 강한 리더십은 리더가 자리를 비워도 흔들리지 않는 팀을 만드는 것이다. 회장이 직접 뛰는 것은 헌신이다. 그러나 회장만 뛰는 조직은 위험하다. 새해 벽두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장들의 발걸음이, 결국 자신이 없어도 작동하는 조직을 향하고 있기를 바란다.
/김문경(국민대학교 겸임교수·대한리더십학회 부회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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