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실 선거논쟁 유감

파이낸셜뉴스       2026.02.24 18:38   수정 : 2026.02.24 18:38기사원문



정치철학자 랭던 위너는 '기술은 정치성을 갖는가'라는 논문에서 뉴욕 도시설계가 로버트 모제스의 다리 이야기를 꺼낸다. 모제스가 설계한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는 유독 낮게 만들어졌다. 버스가 다리 밑을 통과할 수 없는 높이였다.

그 결과 대중버스를 주로 이용하던 흑인과 저소득층은 다리 너머 공원으로 놀러가기 힘들었다. 공교롭게도 공원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백인 중산층의 전유물이 됐다.

이 사례는 설계자 입장에서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만약 설계 전부터 일부러 특정 계층의 접근을 막으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그것은 정치적 설계다. 기술이 정치색을 띠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반면 어떠한 의도 없이 만든 다리가 결과적으로 특정 집단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부실 설계다.

1980년 발표된 논문을 끄집어낸 이유는 최근 벌어지는 미국 부정선거 논쟁을 설명하는 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선거제도를 뜯어고치자는 논쟁이 뜨겁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 공화당이 추진하는 'SAVE(Safeguard American Voter Eligibility·투표자격보호)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했다. 투표 때 얼굴 사진이 포함된 시민권 증빙서류를 제시해야 하고, 우편·온라인 유권자 등록을 제한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 논쟁이 벌어진 배경은 명확하다. 불법 이민자의 대리투표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유권자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채 투표하는 관행 탓에 부정투표가 벌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을 가진 유권자만 투표권을 인정하자는 게 공화당 법안의 취지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불법 이민자는 애초 투표권이 없다는 점에서 이 법안이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상당수 시민이 시민권 증빙서류를 갖추지 못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법안이 시행되면 수많은 사람이 투표자격을 잃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랭던 위너의 관점에서 팽팽한 양측 입장을 들여다보자. 공화당 법안은 유권자 분별을 명확히 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선거 무결성을 표방한다. 그렇다면 이건 부실선거 제도를 개선한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층을 배제하려는 의도로 법안 설계가 준비됐다면 제도의 중립성을 잃은 것이다. 물론 양측 모두 중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너의 언어로 말하자면, 정치 영역으로 들어선 순간 중립적인 설계란 없다.

한국도 이 질문 앞에서 예외가 아니다. 부정선거 의혹이 끝없이 제기된다. 위너의 관점과 미국 부정선거 논쟁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선, 한국에서 부정선거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유일한 판별법은 정치적 의도를 간파하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알아채는 안목으로 부정선거와 부실선거를 구분하는 일이다. 선거제도를 고쳐 특정 정당의 지지층에 유리한 접근성을 만들려는 의도가 깔렸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조적 부정선거론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부정선거 논쟁은 미국에 비하면 지나칠 만큼 소박하다는 점이다. 미국 부정선거론자들은 각 주에서 관장하는 선거업무를 중앙에서 관장하고 확실한 신분 확인 방식을 도입하길 원한다. 그런데 한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전국을 통일된 기준으로 관리하고,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다. 어쩌면 미국 공화당이 이루고 싶은 이상적인 투표 제도가 우리 사회에 정착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더구나 지금은 인공지능(AI)이 인류 문명의 판도를 바꾸는 시대다.
선거 부정을 탐지하는 알고리즘이 개발되고, 블록체인 기반의 투표 시스템이 논의되고, 생체인증으로 유권자를 식별하는 기술이 우리 손에 있다. 그러나 뛰어난 기술도 사회적 신뢰와 합의가 없다면 오염되고 만다. 불신과 음모론 시대에 유감이다.

jjack3@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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