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호랑이가 된 세 사람 "하나처럼 느껴질 때 가장 짜릿했죠"
파이낸셜뉴스
2026.02.24 20:43
수정 : 2026.02.24 20:43기사원문
퍼펫티어 박재춘, 김예진, 임우영 인터뷰
[파이낸셜뉴스] “단순히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져야 해서, 그게 가장 큰 숙제이자 목표였어요.”
유명 소설 원작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연기하는 퍼펫티어 김예진(심장)의 말이다. 이 작품에서 퍼펫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주연이다. 특히 난파당한 주인공 파이의 기나긴 여정에서 뱅골호랑이 파커는 극의 긴장과 감정을 견인하는 핵심 존재로 기능한다.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라이프 오브 파이' 한국 초연에서는 세 팀의 파커가 있다. 그중 ‘박재춘(머리)-김예진(심장)-임우영(다리) 팀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녔다. 머리를 맡은 박재춘과 다리·꼬리를 담당한 임우영은 오랜 시간 인형극을 해온 배우다. 반면 심장을 맡은 김예진은 무용을 꾸준히 한 연극 배우 출신으로, 이번 작품이 첫 퍼펫티어 도전이다.
“동물은 위험해야 한다”…리얼리즘의 숙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소년 파이가 선박 침몰 사고 후 벵골호랑이 파커와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에서 표류하는 믿기 힘든 여정을 담았다. 영국 올리비에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퍼펫 파커를 비롯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등 난파선 목재로 만든 듯한 동물 퍼펫이 실제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퍼펫은 실제 벵골호랑이의 골격과 근육, 움직임을 바탕으로 설계됐다. 대부분 플라스타조트(Plastazote) 소재로 제작됐고, 관절에는 번지 코드(bungee cord·탄성 고무줄)를 적용해 탄력 있는 움직임을 구현했다. 퍼펫티어의 몸을 숨기지 않는 구조 역시 특징이다. 배우의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진짜 호랑이’를 믿게 만들어야 한다.
박재춘은 “의인화가 아니라 리얼리즘을 추구한 점이 가장 달랐다”며 “가만히 쳐다볼 때 살아있다고 느꼈다는 관객의 반응이 정말 신기했다”고 했다. 이어 “퍼펫은 결국 사물이고 죽어 있는 오브제지만,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생명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예진은 “본능과 움직임으로만 설득해야 하는 점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며 “최소한의 움직임이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줄 때가 있다. 가만히 서서 호흡만으로 살아있음을 전달하는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이 ‘한 마리’가 되기까지
리차드 파커 팀은 오디션과 워크숍을 거쳐 구성됐다. 퍼펫의 갈비뼈 구조 안에 들어가야 하는 심장 포지션은 신체 조건이 중요했고, 머리는 무게를 견딜 체력과 키, 다리는 균형과 하체 힘이 필요했다. 사전 연습 기간 동안 다양한 인형극 등의 워크숍을 거쳐 최종 팀이 확정됐다.
세 사람은 공연 전 2~3개월 동안 매일 10시간이 넘는 훈련을 반복했다. ‘호흡·시선과 집중·무게감·정지(Stillness)·리듬·상상력·마임’이라는 일곱 가지 핵심 원칙을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박재춘은 “반복 훈련이 답이었다”며 “머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다른 파트가 감각적으로 반응하도록 몸에 새겨 넣었다”고 말했다. 김예진 역시 “체력과 집중력 다 중요했다”며 "미세한 진동이나 힘의 방향만으로도 서로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느껴졌다. 매일 다르지만, 그 다름을 알아채는 집중이 중요했다"고 부연했다.
임우영은 “처음엔 머리를 따라야 할 것 같았지만, (다리을 맡은 저로선) 심장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읽어야 했다”며 “웅크린 자세로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가야 하는 순간이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다”고 연습 과정을 떠올렸다.
“진짜 호랑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사람인데 동물을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을까? 파이에 대한 감정은 어떠할까? 인간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자 그들 역시 다소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인간적 감정을 덧입히면 안됐다"고 답했다.
박재춘은 “배우로서 개인적인 감정은 있을 수 있지만, 파커가 누군가에게 감정을 갖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는 끝까지 본능의 존재”라고 답했다. "가장 조심한 게 인간적인 감정을 덧입히는 일이었다. 무엇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거나 의인화하려는 순간, 파커가 아니라 사람이 된다”고 설명했다.
동물원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 대해 김예진은 “위협적이면서도 압도적인 생명력을 보여줘야 했다”며 “단순히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져야 했다”고 돌이켰다.
파이 역할로 박정민과 박광현이 호연 중이다. 배우에 따라 퍼펫티어의 호흡도 달라질까? 김예진은 “에너지의 결이 미세하게 다르지만, 결국 주는 만큼 반응한다”며 “더 강하게 다가오면 우리도 더 강하게 달려든다”고 답했다.
박재춘은 “처음 훈련 영상을 다시 보니 정말 못하더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 사람이 연결된 마음과 호흡이 완전히 다르다. 세 명이 하나처럼 느껴질 때 가장 짜릿하다”며 뿌듯해했다.
김예진은 짜릿한 순간으로 마지막 장면을 꼽으며 “멕시코 해안에 도착해 파이와 함께 쓰러졌다가, 천천히 일어나 한 방향을 바라보며 퇴장하는 장면이 특히 좋다”고 했다. 그는 “돌아보지 못하지만 가장 느리고 지쳐 있는 걸음을 표현해야 한다”며 “그날의 해석과 감정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매 순간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임우영은 1막 마지막 바다에서 헤엄치던 장면을 언급했다.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장면이라 애증이 있다”고 했다. 그는 “바다에 빠진 뒤 배에 오르려는 데 파이가 밀어내는 장면이 있다”며 “그 장면이 잘 마무리되면 호흡이 정확히 맞았다는 신호라서 가장 짜릿하다”고 돌이켰다.
국내 인형극계에 큰 자극돼
이 작품은 국내 인형극계에도 큰 의미를 남겼다. 퍼펫을 아동극의 영역으로 한정하던 편견을 깨고, 리얼리즘 퍼펫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박재춘은 “국내에서 이 정도 규모의 리얼리즘 퍼펫을 구현한 사례는 드물다”며 “거대한 오브제를 실제 동물처럼 믿게 만든 점에서 인형극계에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공연을 본 관계자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들었다”며 “이 작품을 계기로 새로운 흐름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우영도 “퍼펫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여준 사례”라고 공감했다.
연극 제작도 병행하는 박재춘은 “연극을 기반으로 움직임과 오브제를 결합하는 창작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며 “‘인형극=아동극’이라는 편견을 단번에 허문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라고 강조했다. 임우영 역시 “성인을 위한 퍼펫극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무대”라며 향후 작업에 대한 기대와 도전 의지를 드러냈다.
김예진은 “새로운 언어를 배운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말이나 표정이 아니라 움직임과 호흡, 상대와의 연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해줬다”며 “배우로서 기본으로 돌아가게 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박정민, 박강현 배우를 비롯한 27명의 주역과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한 퍼펫 예술로 호평을 얻고 있다. 오는 3월 7일부터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앞서 박정민은 “망망대해 위의 파이와 리차드 파커의 여정, 지금까지 쉽게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대가 부산에서도 펼쳐질 예정이니 특별한 경험을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박강현은 “마지막 도시 부산 공연에서 관객 여러분을 만날 생각을 하니 많이 떨린다. 리차드 파커와 소년 파이의 아름다운 여정에 함께해 주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전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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