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우리가 학원 인수했어?"... 월급보다 무서운 '영어유치원·학원비' 청구서
파이낸셜뉴스
2026.03.01 09:00
수정 : 2026.03.01 09:32기사원문
"영유비가 의대 등록금 2배?"... 통계가 증명한 '에듀푸어'의 민낯
"안 시키면 내 아이만 도태"... 27조 사교육 시장의 씁쓸한 원동력
학원 '대주주'는 못 돼도 지갑은 연다... 노후와 맞바꾼 자식 농사
[파이낸셜뉴스] "여보, 이번 달부터 민준이 영어유치원비가 올랐대. 그리고 초등 대비 수학 학원도 미리 등록해야겠어."
2월 8일 일요일 아침. 아내의 통보에 직장인 A씨(43)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지난달 '카드값 폭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날아온 또 하나의 거대 청구서. A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는 대한민국 3040 부모들이 마주한 서늘한 현실이다.
5화에서는 내 집 마련은 포기해도 자식 교육은 포기 못 한다는 '사교육 공화국'의 슬픈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 팩트 체크: "영어유치원, 의대보다 비싸다"는 사실일까?
A씨의 비명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은 통계가 증명한다. 기자가 교육부와 대학정보공시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현실은 생각보다 더 가혹했다.
서울 주요 학군지 영어유치원(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월평균 비용은 약 150만~170만 원 선이다. 하지만 여기에 셔틀비, 교재비, 급식비 등 '숨은 비용'을 합치면 실제 학부모가 부담하는 금액은 월 200만 원에서 많게는 300만 원에 육박한다.
이를 연간 비용으로 환산하면 약 2500만 원~3000만 원 수준이다. 이는 국내 4년제 사립대학 연평균 등록금(약 762만 원)의 3배가 넘고, 국내 의과대학 연간 등록금(약 1000만 원 초반대)보다 2배 이상 비싼 금액이다. 의대생을 키우는 것보다 유치원생을 키우는 데 돈이 더 드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 통계로 본 현실: "월급은 학원 원장님께 바친다"
이 고통은 A씨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통계청의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 대한민국 사교육비 총액은 27조 1천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 학원비 지출은 폭증하는 기현상이다.
직장인 B씨(40)는 "실수령액이 400만 원 남짓인데, 두 아이 학원비로만 200만 원이 나간다"며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회사를 다니는 건지, 학원 원장님들 월급 드리려고 다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라고 씁쓸해했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역시 40대 가구 지출 1위가 '식비'가 아닌 '교육비'임을 보여주고 있다.
◇ 엄마의 항변과 전문가의 진단
그렇다면 아내들은 이 비현실적인 비용을 왜 감당하려는 걸까. 엄마들이 느끼는 것은 허영심이 아니라 실존적 공포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주부 C씨(39)는 "나도 내 옷, 내 화장품 안 사고 돈 아끼고 싶다. 하지만 '불안감'이 나를 학원으로 이끈다"고 토로했다. "주변 애들은 영어로 대화하고 수학 선행을 끝내고 오는데, 우리 애만 도태될까 봐 빚을 내서라도 시킬 수밖에 없다. 이건 생존의 문제다."
이에 대해 교육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 특유의 '죄수의 딜레마'를 지적한다. 한 교육계 전문가는 "대학 서열화와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가 공고한 상황에서,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는 사교육 마케팅이 결합한 결과"라며 "개인의 노력을 넘어선 구조적인 비극"이라고 분석했다.
◇ "그래도 어쩌겠어, 내 새끼인데"
결국 A씨는 투덜대면서도 송금 버튼을 누른다. 비록 학원을 '인수'할 재력은 없지만, 오늘 저녁 "아빠, 나 영어 단어 다 외웠어!"라고 자랑할 아이의 웃는 얼굴을 '매수'한 셈 치기로 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영락없는 '마이너스 투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성보다, 자식을 위하는 본능이 더 앞서는 것을.
"여보, 대신 내 술값은 좀 줄일게."
대한민국 27조 원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오늘도 묵묵히 노를 젓는 모든 '에듀푸어' 가장들에게 건투를 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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