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고무줄이라고?'… 3배 늘려도 쌩쌩한 '전자 피부' 나왔다
파이낸셜뉴스
2026.03.12 05:56
수정 : 2026.03.12 05:56기사원문
<13>이화여대·아주대·취리히연방공대 공동연구팀
300도 고온에도 견디는 신축성 소재 개발
몸에 착 붙는 '스티커 컴퓨터' 시대로 한걸음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쭉쭉 늘어나는 전자 피부의 시대
이번 연구 성과는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던 '전자 피부'를 현실로 한 발짝 더 끌어당겼다. 지금까지의 반도체는 딱딱하거나, 조금만 늘려도 전기 통로가 끊어져 성능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개발된 소재는 원래 길이보다 300% 이상 늘려도 전기적 성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10cm짜리 소재를 40cm가 될 때까지 잡아당겨도 성능 저하가 전혀 없는 셈이다.
■레고 블록처럼 정밀하게 쌓은 '분자 설계'
연구팀은 이 놀라운 결과를 얻기 위해 '다중블록 공중합체'라는 특별한 구조를 설계했다. 전기를 잘 전달하는 '단단한 블록(P3HT)'과 고무처럼 신축성이 좋은 '말랑한 블록(PDMS)'을 분자 단위에서 촘촘하게 연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리빙 중합(Living Polymerization)' 기법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쌓아 올리듯 분자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연구팀은 이 기법을 통해 두 성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조절함으로써, 소재를 극한으로 늘렸을 때도 전기 통로가 비틀리거나 끊어지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300도의 불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성능
실험 결과는 숫자로 증명됐다. 소재를 300% 늘려도 표면에 미세한 균열조차 발생하지 않았으며, 전기가 흐르는 효율인 '전하 이동도' 역시 늘어나기 전과 똑같은 100점 만점의 성적을 유지했다.
또한, 보통의 유연 소재가 100도만 넘어도 녹아버리는 것과 달리, 이 소재는 무려 섭씨 300도의 고온 열처리 후에도 반도체 특성을 잃지 않았다. 이는 튀김 기름보다 훨씬 뜨거운 온도에서도 버틸 수 있다는 뜻으로, 복잡한 반도체 제조 공정도 거뜬히 견딜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번 연구 성과는 화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앙게반테 케미(Angewandte Chemie)'에 게재되며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언박싱은 여기까지다. 딱딱한 반도체가 부드러운 고무처럼 변신해 우리 몸의 일부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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