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가스터빈, 더 큰 미래로'..박정원 회장 친필이 말하는 것
파이낸셜뉴스
2026.03.23 13:54
수정 : 2026.03.23 13:54기사원문
오태섭 터빈2공장장 "협력사는 동반자..4만개 부품 뒤에 창원·부산 강소기업이 있다"
세계 유일 '원스톱' 터빈공장..카멜레온 전략으로 에너지 전환기 돌파
【파이낸셜뉴스 창원=강구귀 기자】지난 18일 경남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터빈공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조립동 한쪽 벽면에 눈길을 사로잡는 글씨가 있었다. '두산 가스터빈, 더 큰 미래로 박정원'. 두산그룹 박정원 회장이 지난 2월 중순 각 계열사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남긴 친필이다. 짧은 한 줄이지만 가스터빈 사업을 그룹의 미래 핵심 동력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총수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친필 아래, 축구장 10배 크기의 단일 지붕 아래에서 380MW급 가스터빈이 조립 공정을 거치고 있었다. 한 기당 부품 수만 4만여 개. 거대한 금속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창원·부산·경남 일대 수십 곳 중소 협력업체의 기술이 촘촘히 담겨 있다.
세계 유일 '원스톱' 터빈공장..가스터빈 중심으로 재편
이 공장은 1982년 건설돼 연간 18GW 발전설비 생산능력을 갖췄다. 스팀터빈(복합화력), 가스터빈, 원자력터빈, 풍력터빈 발전기를 모두 제작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원스톱(One-stop) 터빈 생산기지’다. 오태섭 터빈2공장장은 "여러 종류의 터빈을 모아놓은 곳으로는 세계 최대 단일 규모"라며 "살아남기 위한 DNA가 유연한 공정을 만들었고, 지금도 고객 주문에 따라 변신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 공장은 북미 물량을 위한 가스터빈 스탠드 확대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과거 1000MW급 석탄화력발전용 스팀터빈이 주력이던 시절과는 사업 구조 자체가 달라져서다. 석탄화력 수요가 줄고 380MW 가스터빈과 180MW 스팀터빈을 조합한 복합화력발전 시스템이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공장 레이아웃까지 가스터빈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오 공장장은 "공정별로 협력사와의 분업 체계를 강화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며 "두산에너빌리티는 핵심 조립과 시스템 통합에 집중하고, 협력사들은 고도화된 가공 역량을 기반으로 생산 효율을 함께 높여가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380MW 가스터빈 수주 물량이 확보된 만큼 핵심 부품을 선발주해 리드타임을 줄이는 것도 가능해졌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미국 빅테크 데이터센터향 가스터빈 수출로 '기술 종주국' 미국의 문을 두드린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추가 7기를 수주하며 미국 누적 계약 12기를 확보했다. 2029년 5월부터 월 1기씩 공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시장은 '두산의 쾌거'로 조명하지만 현장 최일선에서 이 성과를 지휘하는 오 공장장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이번 수주는 회사가 중장기적으로 가스터빈 개발을 기획하고 상용화한 성과"라면서도 "대형 프로젝트를 연속적·대량으로 수주하고 일정에 맞춰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협력사들의 역량과 생산 능력이 함께 뒷받침됐다"고 강조했다. 두산과 함께하는 협력사들이 대규모 1·2차 벤더 중심이 아니라 특수 공정과 고난도 부품을 담당하는 다수의 중소기업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가스터빈은 '기계공학의 꽃'이라 불린다. 1600도 이상 초고온에서 회전하는 블레이드, 머리카락 굵기 10분의 1 수준의 정밀 조립이 필요하다. 터빈 블레이드와 로터는 천분의 5mm 이내 정밀 가공을 진행하고, 소재 단계부터 초음파 검사(UT 테스트)로 미세 크랙까지 검출한다. 요구되는 정밀도는 반도체에 비견된다.
그는 "국내 가스터빈 산업은 '불모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전력·발전이라는 유사 산업은 있었지만 가스터빈은 요구 기술 수준과 제품 특성이 크게 달라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볼트·너트 하나 만들던 회사"에서 정밀제조 파트너로
두산에너빌리티는 이 문제를 '함께 키우는 방식'으로 풀었다. 국책과제와 자체 R&D에 협력사를 적극 참여시켜 초기 투자 부담을 낮추고 개발 단계부터 품질 기준과 기술 요구사항을 공유·축적하도록 했다. 부품 종류도 다양해 중소기업 대표들과 개발 초기 단계부터 머리를 맞댔다.
그는 "규모가 큰 벤더(협력업체)가 없다"고 단언했다. "가스터빈에는 요소요소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이를 한꺼번에 소화할 대형 벤더가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소기업과의 협력이 중요하고 동반상생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볼트·너트 하나를 제조하던 수준이었던 협력사들이 지금은 정밀제조 역량을 스스로 키웠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두산이 비용을 투자해 '이렇게 만들어 와라'고 요구하는 구조였지만 도전과 시행착오,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협력사 스스로 설계·제작·품질·공정 전반의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노하우가 전무했던 협력사들이 글로벌 수준의 품질을 충족하는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했다. 대부분의 부품을 이들 중소기업으로부터 조달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이 '검증의 시간'은 고스란히 해외 수주 경쟁력이 됐다. 2019년 국산화 이후 실증과 상업운전을 거치며 발주처·제조사·협력사가 국책과제 회의체를 통해 시행착오와 개선 사항을 가감 없이 공유했다. 오 공장장은 "타 OEM 대비 짧은 기간에 밀도 높은 검증 과정을 거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이 경험이 해외 고객에게 '운영 관점에서 충분히 검증된 가스터빈'이라는 신뢰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동반상생의 구조를 두고 "같은 파트너로서 우리가 힘들면 벤더들도 어렵다. 반대로 우리가 수주를 많이 하면 물량을 많이 줄 수 있고 함께 매출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 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 등으로 물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협력사에 돌아가는 발주 규모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다만 공통의 고민도 있다. 수주 물량의 부하가 시기별로 균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도 생산 부하가 동일하지 않은데 협력업체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MTO(Make to Order)를 기본으로 하되 핵심 부품은 MTS(Make to Stock)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생산 방식'을 가동하고 있다. 협력사에 안정적인 물량과 예측 가능한 부하를 제공하면서 공급망 전체의 납기 리스크를 줄이는 구조다.
그는 "현장에서는 단순히 일정 공유를 넘어 설계 변경·생산 진행·납기 리스크를 협력사와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대응한다"며 "특히 협력사가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정보를 조기에 제공하고, 문제 발생 시 즉시 공동 대응하는 방식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AI 기반 공급망 관리(SCM) 시스템을 개발 중이며 내년까지 구축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산과 협력사가 '하나의 생산팀'처럼 움직이는 디지털 기반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유연함이 생존 DNA..협력사, 스페셜리스트 성장 돕는다
박정원 회장의 친필이 가스터빈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면, 현장을 지휘하는 오 공장장은 이를 정교한 전략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GT(가스터빈), 대형 원자력, SMR(소형모듈원자로) 가운데 무엇이 더 잘 될지 모르는 에너지 전환기에 유연함으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는 “항상 중간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며 “가스터빈 사업에만 치우치기보다는 시장 환경 변화에 대비해 다양한 터빈 생산 역량을 지속적으로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 유일의 원스톱 터빈공장이라는 인프라 위에,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축적된 '생존 DNA'가 이 전략의 근간이라는 설명이다.
안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두산은 임원·공장장·안전 전문가가 협력사의 고위험 작업 현장을 직접 찾아 사전 점검하는 'MSLT(Management Safety Leadership Tour)' 제도를 운영 중이다. 오 공장장은 "안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인식을 바꾼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밝혔다.
오 공장장은 "협력사 하나하나가 두산의 팔로워가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경쟁력을 갖춘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장기적으로 협력사가 독자적인 기술 역량을 갖춰야 수소터빈이라는 더 높은 기술 단계에서도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ggg@fnnews.com 강구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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