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한국조선해양, 배 만드는 회사에서 '조선소 수출' 기업으로

파이낸셜뉴스       2026.03.25 08:55   수정 : 2026.03.25 08:55기사원문
K조선 빅3, 주총서 정관 일제히 손질..한화오션·삼성중공업도 '탈조선' 영토 확장



[파이낸셜뉴스] “향후 신규 조선소 건설 수요가 확대되는 국가를 중심으로 시장을 확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락인 효과를 통해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HD현대의 조선 중간 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이 오는 31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디지털 엔지니어링·매뉴팩처링 플랫폼 개발 및 공급업'을 정관 사업목적에 새로 넣는 것에 대한 HD현대의 답변이다.

조선소 짓는 법, AI로 포장해서 판다


K조선은 수십 년간 배를 깎고, 용접하고, 바다에 띄우는 일이 본업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만드는 법' 자체를 팔겠다고 나섰다. 다. 단순히 선박을 수주·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소를 세우고 싶은 사업자에게 설계부터 생산·운영 시스템까지 '통째로 패키지'를 수출하겠다는 선언이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2025년 조선 빅3의 합산 영업이익은 5조9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3배 가까이 뛰었고, 합산 매출도 53조원을 넘어섰다. 수주잔량은 2029년 인도분까지 쌓여 있다. 하지만 조선업은 '호황이 길수록 꺾일 때 더 아프다'는 DNA를 가진 산업이다. 돈이 들어올 때 다음 판을 준비하지 않으면, 빈손으로 겨울을 맞는다. HD한국조선해양의 디지털 플랫폼 전략은 바로 그 '다음 판'에 대한 답안지다.

HD현대 측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번 HD한국조선해양의 사업목적 추가는 조선소 건설 종합 솔루션이다. 신규 조선소를 짓고 싶은 사업자에게 야드(조선소) 레이아웃 설계, 공정 엔지니어링, 운영 시스템 구축까지 한 묶음으로 제공한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신흥 해양국들이 자체 조선 역량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무(無)에서 조선소를 세우는 건 별개의 문제다. 수십 년 노하우가 녹아든 HD현대의 설계도가 '상품'이 되는 셈이다.

스마트 조선소 소프트웨어 패키지도 사업으로 추가한다. AI(인공지능) 기반 선박 3D 모델링, 차세대 CAD(컴퓨터 지원 설계) 시스템, 선박 생애주기 관리(PLM), 디지털 제조(DM), 자동화 운영 시스템 등 조선소를 '스마트 팩토리'로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 세트를 개발·판매한다.

업계가 주목하는 건 '락인(Lock-in) 효과'다. 한번 HD현대 시스템으로 조선소를 지으면, 유지·보수·업그레이드까지 HD현대에 의존하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Windows) 운영체제로 전 세계 PC 생태계를 장악한 것과 같은 구조다. 배 한 척 팔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선소가 가동되는 한 돈이 들어오는 반복 매출(recurring revenue)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다.



마스가가 '실험대'..미국·인도 동시 공략


이 사업의 잠재 고객이 눈앞에 있다. 미국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본격 가동한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는 침체된 미국 조선업 부활을 목표로, 한국·일본 등 동맹국과의 협력을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HD현대는 미국 현지 조선소 인수를 검토 중이고, 한화오션은 필리조선소에 50억달러를 투자해 연간 건조 능력을 20척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중공업은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 공동 입찰을 저울질하고 있다.

만약 미국에 새 조선소가 들어선다면, HD한국조선해양의 디지털 플랫폼이 그 설계와 운영의 '뼈대'가 될 수 있다. 인도 역시 자국 해군력 강화와 상선 건조 역량 확보를 위해 대규모 조선소 건설을 추진 중이어서, 수요는 충분하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K조선 빅3의 '탈(脫)조선 영토 확장'은 HD한국조선해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화오션은 이번 주총에서 해상풍력 중심의 신재생에너지 밸류체인 전반을 정관에 정식 반영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 설비 설치·운영·판매, 에너지 공급·판매, 발전사업권 양수도, 관련 컨설팅·용역업 등이 망라됐다.

이미 지난해 12월 전남 신안군 해역 390MW 규모 '신안우이 해상풍력' EPC(설계·조달·시공) 도급계약을 현대건설과 공동 체결했다. 총 계약금 2조6400억원 중 한화오션 몫이 1조9716억원이다. 국내 최초 15MW급 터빈 설치가 가능한 풍력발전기 설치선(WTIV)도 직접 건조해 투입할 예정이다. 배를 만드는 기술로 '바다 위 발전소'를 짓는 회사로 변신 중인 셈이다.

삼성중공업도 교육서비스업을 정관에 추가했다. 경남 산청 소재 연수원을 '삼성중공업 인재개발원'으로 재단장해 외부 연수 수요를 흡수하고, 시설 대관 등을 통해 부가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구상이다. 얼핏 소소해 보이지만, 조선 기술 교육 수요가 마스가 프로젝트 등으로 급증할 경우 의미 있는 수익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K조선 빅3가 일제히 정관을 손질한 건 같은 고민에서 출발한다. 조선업은 슈퍼사이클에 수주가 밀려올 때 실적이 치솟지만, 업황이 꺾이면 수주 공백과 수익성 악화가 동시에 덮치는 전형적 경기 민감 산업이다. 2008년 정점을 찍은 뒤 10년 넘는 혹독한 불황을 겪으며 체득한 교훈이다.

2025년 빅3 합산 수주액 359억3000만달러, 수주잔량 200조원 육박. 숫자만 보면 '지금이 절정'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호황기에 확보한 현금과 기술력으로 비(非)조선 사업을 키워 수익원을 다변화하고, 중장기 성장 기반을 깔아놓지 않으면 다음 겨울은 더 춥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K조선의 진짜 경쟁력은 배를 잘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호황의 끝을 미리 준비하는 힘, 그것이 30년 넘게 글로벌 1위를 지켜온 비결"이라고 말했다.

ggg@fnnews.com 강구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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