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왜곡 비석 옆에 ‘바로 세운 진실’ 세웠다

파이낸셜뉴스       2026.03.28 17:47   수정 : 2026.03.28 17:47기사원문
제주도, 함병선 공적비·군경 공적비 평화공원 이설
오영훈 “역사 왜곡·폄훼, 도민과 함께 바로잡겠다”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4·3 역사를 왜곡하거나 가해 책임을 흐리게 만든 비석들을 제주4·3평화공원으로 옮기고, 그 옆에 공식 진실을 담은 안내판 ‘바로 세운 진실’을 세웠다. 없애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왜곡의 흔적을 남기되 그 곁에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적어 후대의 교훈으로 삼겠다는 취지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28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함병선 장군비와 군경 공적비·충혼비 이설 및 안내판 설치 행사를 열었다.

지난해 12월 박진경 추도비 옆에 첫 안내판을 세운 데 이은 두 번째 조치다.

이날 행사에는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하성용 제주4·3특별위원장,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묵념과 경과보고에 이어 안내판 설치의 의미를 함께 되새겼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철거’가 아니라 ‘맥락화’다. 문제의 비석을 치워 흔적을 지우는 대신 왜 문제가 되는지, 정부 공식 보고서는 무엇을 확인했는지, 가해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옆 안내판에 적시했다. 예전에는 ‘공적’만 적혀 있던 자리에 이제는 ‘그 공적 서사가 감춘 진실’이 함께 놓이게 된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함병선 공적비다. 이 비석은 1949년 6월 ‘제주도치안수습대책위원회 남제주군지회’ 명의로 세워져 제주시 오등동 특수전사령부 훈련장 안에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정부 공식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함병선을 전혀 다른 위치에 놓는다. 제2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북촌리 주민 집단 학살을 주도했고, 두 차례 군법회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재판 절차 없이 수많은 민간인 처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이런 내용을 함병선 공적비 옆 안내판에 분명히 적었다. 비석만 보면 ‘공을 세운 인물’처럼 읽히지만, 국가가 확인한 공식 기록을 함께 보면 4·3의 가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군경 공적비와 충혼비도 함께 옮겨졌다. 이 비석들은 제주지방기상청 부지에 방치돼 있던 시설물로 1949년과 1950년 각각 세워졌다. 내용만 놓고 보면 군과 경찰, 우익단체의 활동과 희생을 기리는 형식이지만 제주도는 이 역시 4·3의 복합적인 역사 맥락 속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4·3을 둘러싼 오래된 갈등 중 하나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국가폭력 책임을 어디까지 분명히 할 것인가”에 있었다. 정부 보고서가 나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현장 곳곳에는 여전히 과거의 서사를 일방적으로 남긴 비석과 표지석이 남아 있었다. 제주도가 이번에 손댄 것은 그 공백이다.



행사에서는 시 낭송도 이어졌다. 김수열 시인은 남원읍 신흥리 몰라구장을 채록하는 과정에서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죽은 병아리를 위하여’를 낭송했다.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4·3의 비극을 담담하게 환기하는 작품이다. 숫자와 기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4·3의 상처를 문학으로 다시 불러낸 순간이었다.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함병선 공적비를 4·3평화공원으로 옮긴 것은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죄상을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 살아 있는 ‘죄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라며 “반면교사의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정부 공식 보고서가 나온 지 23년이 지났지만 가해자의 책임을 끝까지 묻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다”며 “누가 가해자인지 역사 앞에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도민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오영훈 지사는 자신의 가족사도 꺼냈다. 오 지사는 “김수열 시인의 시에 나오는 마을이 제 고향이고, 그해 겨울 조부와 증조부를 잃었다”며 “이것은 제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희생자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은 4·3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를 도민과 함께 바로잡는 두 번째 자리”라며 “희생자 명예를 훼손하고 유족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도는 앞으로도 자문단과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경찰지서 옛터 표지석 등 4·3 역사 왜곡 논란 시설물에 대한 안내판 설치나 이설을 순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잘못됐는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바꿔가겠다는 구상이다.

오는 4월 3일에는 제78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처음 맞는 추념식이다.
4·3의 진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후대에 전할 것인지를 둘러싼 제주사회의 과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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