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푸드, K컬처와 이별할 때
파이낸셜뉴스
2026.03.29 19:36
수정 : 2026.03.29 20:02기사원문
1971년 도쿄 긴자 거리에서 정장의 젊은 회사원들이 종이컵에 담긴 뜨거운 면을 포크로 말아 올리는 생경한 풍경은 컵라면의 세계화를 이끈 서막이었다.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 회장이 발명한 컵누들은 젓가락과 대접이라는 동양의 문법을 깼다. 그 대신 포크와 컵이라는 서구화를 택했다. 컵누들은 단순히 새로운 아시안 푸드의 등장이 아니었다. 라면이 동양적 굴레를 벗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묘한 기시감이 든다. 지금 K푸드가 누리는 호사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1980~199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홍콩 영화의 열풍 속에 딤섬과 완탕면은 큰 인기를 끌었다가 시들해졌다. 홍콩 영화의 기세가 꺾이자 에스닉푸드 코너의 구석진 자리로 밀려났다. K컬처의 '후광효과'가 없다면 K푸드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나라 식품사들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더 명확해진다. 불닭볶음면이 '매운맛 챌린지'라는 글로벌 유행 덕에 독주하고 있다. 그 뒤를 받쳐줄 든든한 메가 브랜드는 보이지 않는다. 신라면, 비비고, 초코파이도 선전하지만 글로벌 메가 브랜드로서는 아직 부족하다.
지난해 닛신식품 홀딩스의 매출액은 7766억엔(약 7조원)이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매출 1조엔 고지를 향해 순항 중이다. 삼양식품도 작년 매출 2조원(약 14억달러) 시대를 열며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갈 길이 멀다. 닛신은 여전히 삼양식품의 3배가 넘는 거대한 벽이다. 글로벌 컵라면 시장점유율도 닛신은 26%가 넘는 독보적 1위다. BTS, 오징어게임, 케데헌 없이도 굳건히 정상을 지키고 있다.
닛신의 세계화 비결은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지키는' 철저한 현지화에 있었다. 안도 회장은 미국 진출 당시 면의 길이를 줄이고, 스티로폼 컵을 도입하는 파격을 택했다. "일본의 방식이 옳다"는 고집을 버렸다. 그 대신 "그들의 찬장 속에 들어가겠다"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닛신을 케첩이나 시리얼 같은 '생활 필수재' 반열에 올린 것이다. 홍콩의 이금기(李錦記)는 어떤가. 굴소스 하나로 전 세계 주방을 장악했다. 인도네시아의 인도미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미고렝을 침투시킨 것도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문화팔이'가 아닌 배고픔을 가장 저렴하게 해결해 주는 '제2의 주식'으로 마케팅을 집중했다.
이 지점에서 K푸드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자. '한류'라는 달콤한 마취제에 여전히 취해 있는 게 사실이다. K컬처로부터 독립할 때다. K푸드가 주는 독보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
세계 최대 식자재 기업인 ADM(Archer Daniels Midland)이 발표한 '2026 글로벌 요리 트렌드 보고서'에 눈길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고서는 K푸드의 진짜 무기는 자극적인 매운맛이 아니라 '발효'라는 시간의 미학과 '저속노화'라는 건강한 철학으로 봤다. 김치, 고추장, 된장이 K푸드의 진짜 병기라는 것이다.
문화는 흐르고 유행은 변한다. 하지만 인간의 미각은 정직하다. K푸드가 '문화적 덤'으로 팔리는 방식은 끝내야 한다. K푸드가 K컬처와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다. cgapc@fnnews.com 최갑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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