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패한 보수'는 부활할 수 있을까

파이낸셜뉴스       2026.03.30 19:16   수정 : 2026.03.30 19:16기사원문
헤리티지 재단 퓰너 이사장
美 보수의 위기 극복에 몰두
가치와 철학 정립부터 제시
이 前대통령 "보수 야권 참패"
韓 보수도 美 위기 때와 유사
초심 돌아가 이념부터 정립을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 에드윈 퓰너 이사장(당시)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다. 대선 국면에서 모 대선주자와 퓰너 이사장의 면담 과정에 배석할 기회가 있었다. 시종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질문은 기자의 인터뷰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친한파로 불리지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한국의 차기 주자가 누군지 탐색하는 면접 과정처럼 느껴졌다. 2025년 사망 전까지 200회 넘게 방한한 그는 진영을 막론하고 한국의 역대 대통령과 교분이 있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여서, 한미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퓰너 이사장은 1973년 헤리티지재단을 설립하면서 '보수적 가치를 정책으로 구현하는 행동하는 싱크탱크'를 목표로 내세웠다. 그는 미국 보수주의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했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사임, 포드 대통령의 닉슨 사면 이후 공화당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도덕적·정치적 파산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정책적 공백이었다. 민주당이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보수 진영은 이에 대항할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헤리티지재단은 '이념적 고립'과 '정책적 무력감'으로 인한 '미국 보수주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작은 정부, 개인의 자유, 기업의 자유, 전통의 보호, 국방력 강화를 보수의 핵심적 가치 표준으로 정립했다. 1980년에는 '리더십 지침'이라는 제목의 1093쪽짜리 정책 제안서를 발표했다. '보수'의 의미를 명확하게 재정립하고 공화당이 집권할 경우의 구체적 정책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보수 가치야말로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감세, 규제완화, 복지비용 삭감, 부국강병 노선 등 세부 정책을 개발했다. "동성애와 낙태운동 등 진보좌파가 사회를 타락시킨다"며 가족의 가치 등 미국 전통을 수호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고루한 이미지 탈피를 위해 대학생들의 자발적 공부 모임을 조직해 보수의 영역을 넓히는 활동도 시작했다.

1980년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이 같은 노력의 산물이다. 실제로 리더십 지침에 바탕을 둔 '레이거노믹스'는 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무기력해진 미국의 경쟁력 회복에 일등공신이 됐다. 국방력 강화정책은 소련 해체로 이어지면서 미국을 유일한 초강대국 자리에 올려놓았다. 한때 수렁에 빠져 구제불능으로 여겨졌던 미국의 보수정당이 부활에 성공한 것에는 특별한 비결이 있지 않다. 보수의 가치와 철학을 정립하고 이에 기반을 둔 정책을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일관성 있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념과 철학에 바탕을 둔 정당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흐릿해진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한 것이다. 현금 살포, 복지 증가 등 일시적 달콤함을 제시하는 진보정당보다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 기업의 자유를 추구하는 보수정당이 청년들에게 더 지속적인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청년층에 호소한 전략이 먹혀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근 국내 한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보수 야권이 '참패'를 겪었다며 이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24년 22대 총선에서의 역사적인 대패,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과 대선 패배, 계속되는 진영 내의 극심한 갈등까지 모두 포함해 '참패'로 규정한 것이다. 보수가 참패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반성 없이,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 등 과거 문제를 두고 분열하고 있다며 "희망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리멸렬, 구제불능, 내부총질, 선거 폭망. 요즘 국민의힘을 평가하는 말의 일부이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우왕좌왕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아니라도 입 달린 사람이라면 모두 험한 말들을 쏟아낸다. 본인들만 모르는 모양이지만 거기에 한마디를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보수에 희망이 없고, 진보진영의 일당 독주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공천, 대표, 전당대회 등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보수의 근본적인 가치와 철학을 명확하게 재정립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00년'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 헤리티지재단과 퓰너 이사장의 사례를 보며 미국 보수의 위기와 부활 과정을 먼저 공부하기 바란다. 퓰너 이사장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정치적 사이클에서 부침은 있는 법이다. 하지만 흐름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결국 중요하고 오래가는 건 이념과 아이디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파도는 언젠가 돌아온다. 그 시간 동안 정치에서 중요하고 오래가는 걸 바로 세우지 않으면 다시 오는 파도조차 올라탈 기회가 없을 것이다.

dinoh7869@fnnews.com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