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는 조선 수주 경쟁력의 마지막 열쇠"
파이낸셜뉴스
2026.03.31 15:58
수정 : 2026.03.31 18:33기사원문
특례보증 70%→95% 높였지만 '타이밍·한도'에 막혀
[파이낸셜뉴스] "배를 만들 능력은 있는데, 계약을 완성할 '열쇠'가 없다."
중소·중형 조선소들이 선수금환급보증(RG)을 두고 토로하는 말이다. 조선업이 슈퍼사이클에 재진입했다는 평가 속에서도 중소 조선 현장에선 RG가 수주전 '마지막 관문'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국회 토론회에서 다시 확인됐다.
"필리핀 선주는 믿는데, 국내 은행은 안 믿는다"
한국야나세는 베트남 선주로부터 2030년까지 선박 12척, 약 5000억원 규모 수출물량을 수주했다. 그러나 RG 발급이 막혀 계약 이행에 난항을 겪었다. 한국무역보험공사(무보)가 지난해 말 처음으로 한국야나세에 341억원(보증비율 95%, 보증금액 323억원) 규모 보증서를 발급했지만, 5000억원 수주 대비 첫 보증이 341억원이라는 현실이 현장의 '체감 부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산업은행에서 두 번째 RG가 이달 발급됐으나 150억원 규모에 현금담보 조건이 붙었다.
더 씁쓸한 사례는 필리핀에서 나왔다. 필리핀 선주는 한국야나세에 "RG 없어도 괜찮다"고 했다. 자기 돈으로 발주하는 만큼, 선수금이 선박 건조에 그대로 쓰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배를 인도받지 못하면 수백억원을 날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국내 조선소의 기술력을 믿고 돈을 맡겼다. 바다 건너 외국 선주가 우리 조선소를 믿는데, 같은 나라 은행은 코앞에 있는 조선소를 믿지 못하는 역설이다.
우영준 한국야나세 회장은 "조선소가 수주하면 30%만 사내 사용분이고 나머지는 철강·기자재 등 협력사 사용분"이라고 설명했다. 한충범 한국야나세 부사장은 "금융권 실무자들이 RG에 회의적이다. 보증한도는 되는데 대출 실적으로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며 "RG 발급 심사기준이 중소·중형 구분 없이 동일하다. 모든 시중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찬 케이조선 대표는 "조선사는 소진한도보다 회전한도를 선호한다"며 "정책금융기관을 제외하면 시중은행은 RG 발급을 하지 않고 있다. 배 담보 말고 다른 것도 내놓으라고 한다. 현재 RG를 통한 선수금은 산업은행 에스크로 계좌를 통해 건조에만 쓸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량 거래처와 신규 수출계약을 체결하고도 RG 발급이 어려워 수주 기회를 잃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단순히 지원 규모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적기에 필요한 지원이 도달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도 "뛰어난 기술력과 생산역량을 갖추고도 자금력과 담보력 한계로 RG 발급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라며 "금융 장벽에 가로막혀 수주 기회를 놓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소·중형 조선소는 지역 산업 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반이지만 RG 확보 문제로 수주 기회를 놓치는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겪어왔다"며 "예산과 제도가 확대된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지원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허 의원은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 지난해 5월 추경 500억원, 12월 본예산 400억원 증액을 이끌어냈다.
70%→85%→95%…비율은 올랐지만 '타이밍'이 관건
정부와 무보는 제도를 단계적으로 확장해왔다. 중소 조선 RG 특례보증 비율은 2023년 3월 70%에서 85%로, 2024년 6월 85%에서 95%로 상향됐다. '보증이 안 돼서 수주를 놓친다'는 현장 호소가 제도 변화로 이어진 셈이다.
지원 총량도 늘고 있다. 무보에 따르면 연도별 RG 지원 실적은 2021년 243억원→2022년 717억원→2023년 1422억원→2024년 5361억원으로 증가했다. 누적 기준으로는 2021년 243억원→2022년 981억원→2023년 4245억원→2024년 5667억원→2025년 1조1028억원으로, 최근 수직 상승세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올해 7400억원 규모의 중소조선 RG 특례보증 지원 계획을 밝히며 "RG 지원 문제는 수주경쟁력과 직결되는 필수조건"이라고 못 박았다.
김 장관은 "설계·엔지니어링 기술 확보, 조선소 DX(디지털 전환) 지원을 통한 효율적이고 안전한 조선소 환경 구축 등을 지원하겠다"며 "앞으로 진행될 한미 조선협력(MASGA)에서도 중소 조선이 새로운 시장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현장은 "체감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수주전은 '연간 총량'이 아니라 '그 주, 그 계약'에서 갈리기 때문이다.
유상철 HJ중공업 대표는 "구조조정을 통해 남은 중소 조선사 3사는 RG 발급 미비로 인한 병목 상태"라며 "정책당국의 조정 없이는 해결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그는 "선수금에는 꼬리표가 달려 있어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검증을 거쳐 지급된다"며 "중소 조선소가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금융기관이 RG 확대에 보수적 관점을 고수하면 중소형 선종을 중국에 내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유 대표는 구체적인 수치도 꺼냈다. "산업은행은 2021년 3억1000만달러 RG 한도를 줬는데, 배 가격이 70% 오르고 수주량도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선수금 60% 기준으로 5~6척에만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정상적 수주를 위해선 12~15척분의 RG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출입은행은 올해 정책기관별 분담 방안에 따라 대한조선과 케이조선을 맡기로 해 HJ중공업은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는 점도 토로했다.
수수료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유 대표는 "2021년 산업은행 수수료율이 0%대였는데 지금은 상당히 올라 매출 대비 영업이익의 2%, 선가의 2%가 RG 수수료로 나간다"며 "제조업에서 영업이익 10% 남기기도 어려운데, 은행이 부담하는 위험 대비 이 수수료가 합당한지 따져달라"고 했다.
김찬 케이조선 대표는 더 날카로운 비교를 내놨다. "무보는 95%를 보증하면서 수수료 1%를 받는데, 시중은행은 5%만 부담하면서 전체의 1%를 받는다. 100%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보는 1.1%, 시중은행은 20%에 해당하는 폭리"라고 꼬집었다.
송기명 대한조선 기획실장은 "RG 발급 대기 건수가 13건이다. 2029년까지 수주물량 대비 5억달러가 부족하다"며 "무보와 시중은행 연계에 약 5개월의 시차가 있는데, 선주는 즉시 발급을 원한다. 이 기간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훈 SK오션플랜트 마케팅센터장도 "최근 국내 선박용 RG 발급부터 어려움을 느꼈다"며 "건설업은 리스크가 무한대인데도 수수료가 0.3~1%를 넘지 않는다. 제조업인 조선의 수수료는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계약 후 RG 발급까지 최소 4~6개월이 걸리는데, 선주가 그만큼 기다리지 않는다. 계약서가 없는 단계에서도 사전 검토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이디도 산업통상자원부 조선해양플랜트과장은 "마스가(MASGA) 등을 통해 대형 조선사 위주로 진행했지만, 중소 조선소도 해외 수주를 시작하면서 사이클 산업을 벗어날 기회가 열렸다"며 "중소형 조선소의 성공 사례가 쌓이면 시중은행의 인식 전환도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오 한국산업은행 기업구조조정2실장은 "개별 건별로 따지고 있다"며 "중소조선사 3사에 부여한 RG한도는 지금 봐도 적지 않은 수준이다. 2024년 금융권 전체에서 3사가 RG를 발급받은 규모는 7억8100만달러인데 산업은행만 5억2700만달러나 된다. 지난해는 11억2000만달러를 3사가 받았다.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이후에도 유일하게 RG 한도를 부여하고 있다. 산업은행으로서는 조선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것이 부담스럽다. RG 보증료는 HJ중공업은 선수금이 높다보니 높은 편이다. HJ중공업에는 급하다고 해서 일회성 한도로 1억7000만달러"라고 강조했다.
박은수 한국수출입은행 팀장은 "올해도 특례보증 1000억원 추경이 이야기 되고 있는 만큼 보증 규모가 5000억원 규모로 늘어날 것"이라며 "RG 발급의 키 플레이어로서 한국수출입은행이 거론된 것을 알고 있다. 최근 3개월 동안 1억3000만달러를 지원했고, 올해 하반기부터 다수 지원을 할 것인데 수출입은행 경영진도 현장을 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거래를 재개하려고 신용평가 등을 하다보니 '리드타임'에 맞추는 것이 시간이 걸렸는데, 올해부터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수주 과정부터 금융기관에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RG 발급 타이밍에 대한 애로사항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오태석 금융위원회 산업금융과 사무관은 "실질적인 시중은행의 RG 발급과 관련한 면책, 인센티브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ggg@fnnews.com 강구귀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