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만 찾는 한풀이 정치, 생활 정치로 국민에 다가가야"
파이낸셜뉴스
2026.04.01 18:15
수정 : 2026.04.01 18:15기사원문
동양철학자 임건순 작가가 본
'한국정치는 과연 희망이 있나'
진보·보수 학문적 구분은 의미없어
정치인들 무속적 코드로 권위 도모
문제 원인 해결보다 국면전환 꾀해
보수는 물질적 산업화 과정서 등장
지금 보수는 오래전 비주류로 밀려
미래를 위해 보수만의 색깔 찾아야
진보, 기득권 밖 국민을 대변 못해
87년 체제 대주주를 위해 희생만
李정부 실용, 큰 기대하기 어려워
진보, 책임감 갖고 건강한 주류로
보수, 자기 사람 소중히 여기면서
젊은 인재를 키워야 내일을 기약
한국은 '갈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념과 지역 갈등은 기본이고 노사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 내·외국인 간 갈등 등이 수시로 터진다. 잠시 봉합될 때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적이 없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과학적 원인 규명은 뒷전이고 희생양을 찾아내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는 방식이 무속의 푸닥거리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언론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전근대로 역행하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갈등과 반복을 이어가는 한국 정치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파이낸셜뉴스에서 젊은 보수 철학자의 생각을 들어봤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란.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 평등과 개혁을 강조하는 진보, 이런 식의 학문적 구분은 한국에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단지 한국의 보수 우파는 물질적 산업화 과정에서 하드웨어 건설과 서구 배우기에는 성공했으나 정신적 근대화에는 실패했다는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보 좌파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서구적 문명화보다는 중화권 대륙으로 회귀하려는 특성이 있어 보인다.
―저서 '한국형 무속 정치학'에서 '무속'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공동체에 비극이 닥쳤을 때 정치인들이 비석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통곡하는 것을 봤을 것이다. 대중의 무속적 코드에 맞춰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일부 정치세력이 망자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국면을 전환하고 지지를 끌어내온 게 현실이다.
―국가적 재난으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물론이다. 망자와 유가족 입장에서 슬퍼하는 것은 공감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너무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서 몰입하는 것을 공감이라고 하기 어렵다. 비슷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원인을 찾고 구조를 바꾸도록 힘을 쓰는 게 우선이다. 우리는 가해자를 찾아 처벌하는 푸닥거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챌린저호 폭발사고 때 감옥에 간 사람이 없다는 방송을 보고 부끄러웠다.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수 있다.(한국 사회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병폐를 한국병이라고 한다. 임 작가는 이 병의 원인으로 4가지를 꼽았다. 명분에 함몰된 지적 전통, 고립주의적 세계관, 억울함과 피해자성을 인정받으려는 태도, 문제풀이가 아니라 한풀이에 집착하는 태도다. 한국의 정치가 이런 한국병을 더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의 위기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앞서 보수가 물질적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했다고 했다. 그 산업화 과정에서 역할을 한 '거인'들은 대부분 일본 등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퇴장한 뒤 우리 손으로 키워낸 보수 인재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보수는 비주류로 밀려난 지 오래인데, 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도전자로서 절치부심하면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사과나무'도 심고 보수만의 색깔, 언어, 서사로 무장해야 한다.
―동양철학자로서 제자백가의 사상이 보수의 재무장에 도움이 된다고 보나.
▲제자백가 중 법가의 부국강병이 보수 우파의 핵심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국가의 존립과 경쟁력을 최우선 가치로 삼으며 강한 경제와 군사력, 효율적 통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한비자는 국가 엘리트들의 힘을 효율적으로 뽑아 쓰기 위한 인센티브를 논한 바 있다. 보수도 이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인센티브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나.
▲인센티브 구조가 모두 망가졌다. 직업군인이 국토방위에 헌신하도록 하고, 인재들이 국내에서 일하도록 하고, 의사들이 필수의료분야에서 일하도록 하는 동기가 없어졌다는 거다. 규제를 없애고 법적 리스크를 완화해주는 일을 정치가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다시 말해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일을 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정치가 되레 몽둥이를 들고 눈만 부라리고 있는 형국이다.
―인센티브 구조를 복원하려면.
▲예를 들어 소방관, 경찰관, 군인 등 공익을 위해 일하다가 돌아가신 분과 사회적 재난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있다고 하자. 모든 죽음이 안타깝고 애도해야 하지만 국가로서는 전자에게 더 많은 유형적 보상을 함으로써 제복 입은 분들의 헌신에 제대로 감사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보상이 거꾸로 된다면 누가 공익에 헌신할 것인가. 시민정신이 무너질 수 있다.
―보수 대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보수의 가장 큰 문제는 대수술을 할 이유도, 의지도 없다는 점이다. 보수 인사 중에는 '내 자식이나 내가 있는 동안만 잘 버티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내가 감투 한 번 더 쓰느냐 안 쓰느냐, 내가 지역구에서 한 번 출마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임 작가는 보수가 국민에게 다가서기 위해 집중해야 하는 최적의 키워드로 '생활인'을 꼽았다. 결혼 후 재취업에 도전하는 경력단절여성, 박봉을 쪼개 부모님 통장에 용돈 10만원, 20만원을 보내는 청년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것이 출발점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단지 약자를 보호한다는 식으로는 진보의 프레임을 따라 하는 것일 뿐이므로 정직하고 열심히 사는 생활인과 함께하겠다는 메시지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생활인들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들이 일하면서 느끼는 정서를 어루만지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보수진영의 청년 정치인들이 수적으로 적은 건 아니다. 그런데도 젊은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진보와 비교했을 때 우수한 인재가 포진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수적 성향의 청년 중 뛰어난 사람들은 경제 분야에서 돈을 많이 버는 데 관심이 더 많다. 보상을 제대로 안 해주고 높은 사람들 뒤치다꺼리만 하는 일을 왜 하느냐 하는 인식이 적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것도 인센티브 문제와 연결된다. 보수의 가치를 키우고 외연을 확장하는 데 투신하는 젊은 정치인을 키우는 생태계를 마련해야 된다.
―진보정치의 현실을 평가한다면.
▲이른바 86세대와 497세대 그리고 상위 조직 노동자들은 어떻게 보면 '87년 체제의 대주주들'이다. 이 대주주들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고, 미래 세대들의 희망이 꺾이고 있다. 진보가 기득권 밖에 살고 있는 보통의 국민들, 즉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들이 겪는 부당한 격차를 줄여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실용을 강조하는 현 정부는 86세대와는 결이 다른 것 아닌가.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이 좀 다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문제는 '87년 체제의 대주주들'의 기득권을 건드릴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일을 해야 기득권 노조 중심의 좌파와 차별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검찰개혁 과정을 보면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사회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고 보나.
▲아쉬운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사이버 렉카'로 불리는 악의적 유튜버들이 유명인을 근거 없이 비하하는 영상을 올려 푸닥거리를 할 때가 있다. 기성언론이 의심하면서 질문하고 교차검증하는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다. 정치와 관련해서는 음모론으로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공론장을 어지럽히는 언론인을 청산해야 한다고 본다.
―진보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주인 행세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는 이미 오래전에 주류가 됐는데도 자신들을 상대적 약자로 가정하고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들이 실질적 오너이면서 차명·가명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한 주류'로 거듭나야 한국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보수는 무얼 해야 하나.
▲자기 사람을 소중히 여겨달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이건 진영논리에 갇히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젊은 인재를 키워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임 작가가 사는 동네는 이른바 부촌과는 거리가 멀다. 이 동네의 수많은 주민들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때마다 새벽부터 태극기를 게양한다고 한다. 서민들의 애국심은 기득권의 애국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임 작가는 보수 정치인들이 이 동네에서 1년만 전세로 살면서 주민들과 부대껴보라고 했다. 지금 보수의 위기는 입으로만 '친서민'을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임건순 작가 약력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학사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부국강병 공동체를 말하다' '오자: 손자를 넘어선 불패의 전략가'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한국형 무속 정치학' 등 저술
syhong@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