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정부의 정책 결단력

파이낸셜뉴스       2026.04.08 18:29   수정 : 2026.04.08 19:12기사원문

한국이 세계 최고 통신 인프라 강국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서비스 성공부터다. 당시 세계적으로 상용화 사례가 없던 CDMA를 국가표준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인 정부의 강력한 정책결단과 기업의 적극적인 협력이 결합, 한국 정보기술(IT)에 '성공DNA'를 만들어냈다.

CDMA 성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정부 부처 간 이견이 치열했다. 신생 부처인 정보통신부는 CDMA를 국가 이동통신 표준으로 정해 미국이나 유럽 기술종속을 탈피하고, 표준 주도권을 쥐겠다는 정책을 짰다. 그런데도 통상업무와 IT정책을 주관하던 상공자원부가 제2 이동통신사업자인 신세기통신에 미국 기술인 시분할다중접속(TDMA)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을 내놨다. 미국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던 TDMA를 도입해야 수출전망이 밝다는 게 논리였다. 정통부는 상공부의 이견을 정리하고 CDMA 단일표준을 밀어붙였다. 선경그룹(현 SK)이 인수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이동통신 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만들어 CDMA 상용서비스에 힘을 실었다. 정치적 구설에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고 시장 가격의 4배나 비싼 돈을 들여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SK가 다시 한번 막대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정통부와 발을 맞춘 셈이다. SK텔레콤이 1996년 4월 세계 최초의 CDMA 상용서비스에 성공하자, 제2 이동통신사업자 신세기통신도 같은 해 6월 CDMA 방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CDMA 성공신화가 현실이 된 시점이다.

CDMA 성공DNA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강력한 정책결단과 명확한 전략이 아닌가 싶다. 미국과 유럽의 상용화 사례가 있는 기술을 추격하지 않고 국책연구기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중심으로 기술을 끌어올리고, 통신사업자와 제조사를 하나의 방향으로 묶어낸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가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30년이나 지난 해묵은 얘기를 끄집어낸 것은 한국의 성공DNA가 주춤거리는 것 아닌가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AI)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알고리즘 경쟁을 넘어선 AI는 전력·반도체·AI데이터센터로 이어지는 막대한 인프라·자본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수백조원 규모의 AI데이터센터 구축계획을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는다. 유럽도 국가 단위로 AI인프라 확보에 뛰어들고 있다. 누가 더 많은 연산능력과 전력을 확보하느냐가 경쟁의 본질이 됐다.

그런데 경쟁의 한복판에 한국이 발맞춰 뛰고 있는지 확신이 안 선다.

AI데이터센터를 둘러싼 정책은 여전히 부처 간 조율이 안된다. 전력 공급은 산업통상부, 입지는 국토교통부, 인허가는 지방자치단체, 데이터 정책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흩어져 있다. 기업들은 수조원 투자계획을 세우고도 전력은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인허가에 몇 년이 걸릴지조차 명확한 답을 듣지 못한다. 클라우드와 AI인프라에 대한 세제 지원도 부처마다 생각이 다르다. 전력망 확충은 지역 갈등에 막혀 지연되고 있고, 환경·입지규제는 글로벌 기준보다 높다. AI 시대의 핵심 자산인 AI데이터센터를 공장으로 볼 것인지, '국가전략 인프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정의조차 정리가 명확지 않다.

30년 전에는 결정하고 설득하고 밀어붙였던 정부가 있었다. 2026년에 보이는 정부의 모습은 이견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결정을 미루고, 다른 부처에 책임을 넘기는 모양새다.

강력한 정책결단과 기업의 협력이 합쳐진 '성공DNA'를 AI에서 가동했으면 한다. AI 경쟁은 속도가 관건이다.
한발 늦으면 비용은 몇배나 커지고, 선택지는 줄어든다. AI데이터센터를 국가전략 인프라로 규정하고, 전력·입지·세제·규제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일괄 추진하는 국가 차원의 원샷 결정이 절실하다. 30년 전 CDMA를 선택했던 우리 정부의 대담함과 투지를 2026년 AI 정책에서 다시 봤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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