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행의 자유' 종말인가… 통행료에 무너지는 글로벌 질서

파이낸셜뉴스       2026.04.15 18:12   수정 : 2026.04.15 18:36기사원문
'항행의 자유'는 국제법에서 보장된 권리
통행료 징수, 유엔해양법협약 위반 명백
18세기 초까지 바다에선 약탈 등 무질서
美, 통행료 거부하며 해군 키워 패권 잡아
美해군이 주요 해상로 경찰 역할하며
공공재된 바다 덕에 글로벌 경제 성장
호르무즈 봉쇄로 전 세계 공급망 타격
이란 통행료에 트럼프 공동 징수 검토
통행료 현실화로 해양질서 무너지며
안전한 바다·값싼 에너지 시대도 종말
新국제질서 태동기에 외교 역할 커져
K외교 '국제적·전략적 환골탈태' 절실



미·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언제 다시 폭음이 들릴지 알 수 없다. 중동 지역은 역사·종교·영토·인종·정치 등의 이슈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어느 편을 들기도 어렵고, 일도양단의 결론을 내기도 어려운 문제이다.

멀리는 구약성경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가까이는 이란 핵 문제까지 다층적·다차원적 관점이 필요하다. 각각의 쟁점에 대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많은 의견과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는 '항행의 자유'라는 국제법적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고자 한다. 예민한 쟁점이 되고 있고, 될 가능성이 큰 '호르무즈해협 통행료'를 키워드로 삼아 항해를 시작한다.

■항행의 자유와 통행료 금지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 모든 국가의 선박은 타국의 간섭 없이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국제법상 권리를 말한다. 모든 국가는 공해(公海)와 타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항행의 자유를 가진다는 대원칙이다. 1982년 체결,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따른 규범이다.

연안국의 영해 내에서도 외국 선박은 해당 연안국의 평화·공공질서·안전을 해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무해(無害)통항권(Right of Innocent Passage)'을 가진다. 호르무즈해협처럼 국제 항행에 이용되는 바다에서는 영해보다 강화된 '통과통항권(Right of Transit Passage)'이 있다. 연안국은 항행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킬 수 없으며, 통항 대가로 통행료를 징수하는 것은 금지된다.

UNCLOS 제26조 1항은 "외국선박이 영해를 통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요금(Charge)도 부과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다만 2항에 따라 외국선박이 '제공받은 특정한 서비스'에 대한 대가(도선료, 항만 이용료 등)를 부과할 수는 있다.

■통행료와 미국 해군의 탄생

18세기 초반까지 바다는 무질서의 무대였다. 국가가 민간 선박에 '나포 허가장'을 주어 다른 선박을 약탈하게 하는 일종의 국가 공인 해적이 성행하기도 했다. 미국은 특히 피해를 크게 입은 국가였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활약했던 대륙 해군은 전쟁 직후 해체되었다. 신생국가로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군이 없어지자 미국 상선들은 해상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게 되었다.

당시 지중해 연안국들은 연안을 지나는 상선들을 약탈하고 선원들을 노예로 삼았다. 많은 나라들은 전쟁비용보다 통행료를 내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판단, 큰 금액을 지불하며 안전을 보장받았다. 매년 국가 예산의 약 20%를 '통행료'나 '보호료'로 바치는 상황은 미국 내부에서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1794년 6척의 군함 건조를 승인하는 '해군법'에 서명하였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조공 대신 대포를"이라는 구호 아래 해군을 지중해로 파견, 1805년 트리폴리 해적을 상대로 승전을 기록했다. 바다에서 통행료를 징수하는 국가와 해적에 대한 대응이 미 해군 창설과 해외파병으로 이어진 기록은 상징적이다.

■머핸과 미국 주도의 해양질서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이 1890년 쓴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미국의 현대 해군 전략과 대외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머핸은 17~18세기 대영제국이 바다를 장악하며 강대국으로 성장한 과정을 분석, 국가의 번영과 안보가 '해양력'에 달려 있음을 밝혔다. 그는 강력한 해양력의 요소로 해군력, 상선대, 해외시장(기지)이라는 세 축을 꼽았다.

머핸의 이론은 당시 연안 방어 위주의 미 해군을 대양함대 체제로 전환하여 신흥국이었던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쳐 파나마운하 건설, 해외 해군기지 확보, '거대 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 운용 등 미국 대외정책의 바탕이 되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황금함대(Golden Fleet)'도 루스벨트 시대 백색함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오늘의 미국 해군은 세계 주요 해상로에서 '지구촌 경찰' 역할을 한다. "미 해군은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표현도 있다. '미국 주도의 해양질서'는 바다가 무법지대에서 글로벌 공공재(Global Commons)로 바뀐 변화를 의미한다. 바다의 위험이 사라지자 보험료가 낮아지고, 전 세계 물동량의 약 90%가 바다를 통해 이동하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탄생했다. 이 같은 체제는 바다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전장에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위한 고속도로로 탈바꿈시킨 문명사적 진보이다.

■호르무즈 통행료 구상

이란전쟁은 미국 주도의 해상질서가 무너질 경우 글로벌 공급망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호르무즈해협이 막히면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위태롭긴 해도 2주간의 휴전 합의에 국제사회가 일단 안도한 이유다. 전쟁 통에 말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호르무즈 통행료' 언급은 충격적이다. 이란은 호르무즈해협 통과 선박에 척당 약 30억원의 통행료 부과 법안을 의회에서 승인했다고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또한 통행료 공동징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큰돈을 벌게 될 것"이라거나 이란과의 합작사업 언급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르무즈 통행료' 구상은 우선 명백한 해양법 위반이다. 선례가 될 경우 글로벌 해상질서가 마비될 우려도 있다.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해협의 통행료는 에너지 가격 폭등과 공급망 혼란을 초래하여 한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특히 그간 '항행의 자유' 수호자를 자처해 온 미국이 통행료 징수에 합의하는 상황은 미국 주도의 국제 항행질서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변형된 통행료 가능성

'통행료'를 언급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비판이 거세지자 태세를 급전환했다. 1차 휴전협상 결렬 후 호르무즈해협 역봉쇄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통행료를 내는 선박은 수색과 차단 대상이라는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하지만 통행료 현실화 가능성은 존재한다.

시카고대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이란이 요구하는 전쟁 배상금 대신 미국이 통행료 징수를 용인할 것이라고 본다. 미국의 패배를 전제로 하는 배상금은 미국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대신 미국의 핵농축 포기 요구를 수용할 경우 이란의 전후복구 비용 명목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은 '거래'일 수 있다. 호르무즈 통행료가 현실화되더라도 산유국들이 통행료를 내게 한다면 중동산 원유 원가 대비 큰 부담이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믈라카해협처럼 관련국들이 자발적 기여금 형식의 분담금을 내는 방안도 거론된다.

■호르무즈 통행료의 상징성

호르무즈 통행료 결말이 어떻게 나든 미국 주도 질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결국 이란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 것은 미국의 패배와 다름없다. 특히 바다 통행료를 계기로 해군을 만들고, 항행의 자유를 수호하던 세계 최고 해군력의 쇠퇴는 미국 입장에서 뼈아픈 사실이다.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라 해도 더 이상 미국의 돈으로 국제 해양질서를 유지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이란이 호르무즈 통행료를 달러 대신 암호화폐나 위안화로 결제를 요구했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달러의 완전한 대체는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원유 거래를 미국 달러로 결제해온 '페트로 달러' 시스템은 미국의 패권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달러와 함께 미국의 위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 주도 해양질서의 쇠퇴는 자유롭고 안전한 바다와 값싼 에너지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저렴한 중동산 원유와 바다를 통한 물류망이라는 혜택도 미국이 엄청난 비용을 들인 덕분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직접 통행료를 내든, 산유국이 부담하든, 분담금 형식으로 기여하든 지금보다 부담이 가중될 것은 분명하다. 중동의 불확실성 때문에 대체 원유 수송방안이나 지역을 찾는 일도 결국 비용으로 돌아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으름장을 보면 상황에 따라 우리 해군이 호르무즈 인근 작전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K외교, K정치

힘이 우선인 전쟁 상황에서 국제법은 무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국제법은 중요하다. 항행의 자유, 무해통항의 원칙 등은 단순한 법이 아니라 대부분 국가(현재 160개국)가 합의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흔들리면서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미국 일극체제가 지탱하던 기존의 질서 대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외교의 부활'에서 이를 세력 전이기(轉移期), 즉 세력 전환의 시기로 표현한다. 유엔해양법협약은 1958년 1차 회의부터 오랫동안의 협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질서를 만드는 장기간 협의 과정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적극적인 외교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걱정은 국내 정치로 향한다. 한국의 국력이 세지고 국격이 높아졌지만 닫힌 민족주의, 이념적 편향성이 짙은 국내 정치가 대외관계에 그대로 투영되고 5년마다 외교 나침반이 바뀌면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신뢰자산 축적을 방해해 왔다고 한다. 세력 전이기의 혼돈 속에서 한국 정치의 내부적 갈등요인을 그대로 국제관계에 대입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 10위권의 국력, 세계 5위권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에 걸맞은 외교역량과 사회통합력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 중국에 대해서도 주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의 국익 차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한다(외교의 부활).

대한민국은 제국주의 경험이 없이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국제사회에서 이미지가 좋은 이유다. 하지만 정치인은 물론 국민도 국제적·전략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다. 내수용 정치와 정치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엄중한 비상시국에서도 매일 목격하는 우리 정치의 모습은 한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세력 전이기, 새로운 질서형성기에 우리 외교와 정치의 환골탈태가 절실하다. K팝 등 K컬처는 물론 요즘은 K방산의 도약도 눈부시다. 지금은 언감생심이지만 외교와 정치에서도 K의 자랑스러움을 말할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dinoh7869@fnnews.com 노동일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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