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존에서 균형점 찾기

파이낸셜뉴스       2026.04.16 18:21   수정 : 2026.04.16 18:21기사원문
평화시계 거꾸로 돌린 하마스
공존 포기하고 상호 파괴로 내몰아
피해자·가해자 뒤엉킨 그레이존
피해 경험을 폭력 정당화의 구실로
국가적 숙제 던진 이란 전쟁
균형감으로 생존 공간 확대를

2023년 10월 7일 아침.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유대교의 추수감사절인 초막절로 군인들은 상당수 휴가 중이었고, 첨단 경보시스템은 사전 타깃 공격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무장한 하마스 대원 6000여명은 이 틈에 가자 접경의 스데롯 등 22개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단 하루 만에 어린이 36명 등 1195명이 살해당했고, 251명이 납치됐다고 이스라엘 정부 보고서는 기록했다. 외신들은 일부 주민들이 산 채로 불태워지고, 참수당했다고 전했다. 공격 2시간 뒤에야 전쟁경보를 발동했던 이스라엘은 그 뒤 하마스와 2년 전쟁을 벌였다.

이날 습격은 중동의 역사적인 변화를 기대하던 때 발생해 평화의 시계를 뒤로 돌려놓았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협상이 결실을 맺기 직전이었다. 그해 9월 22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두 나라는 역사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면서 수교 임박을 시사했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매일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고,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도 "중동은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낙관했다. 사우디 등 걸프지역 왕정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탈석유 시대 경제를 준비 중이었다.

하마스가 당긴 방아쇠는 중동을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증오의 악순환에 빠뜨렸고, 미국의 중동전략과 평화구상도 무너뜨렸다. 하마스 전쟁 2년에 이어 지난해 6월 '12일 전쟁', 지난달 28일 이후 40여일째 이어지는 전쟁으로 불길은 옮겨붙으며 더 커졌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을 겨냥한 미국의 '인도·중동·유럽경제회랑 구상' 아이맥협정(IMEC), 빈 살만의 '네옴시티 프로젝트'도 좌초 위기에 멈춰섰고,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까지 중동 전역이 화마의 불길 아래 위태롭다.

"'침략자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우고, 부패 왕정국가들을 무너뜨리겠다"며 이슬람혁명 수출에 주력해 온 이란. "공존은 더 이상 없다"고 돌아선 이스라엘과 미국, 걸프지역 수니파 왕정국가들. 이들은 가자의 하마스, 예멘 후티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시아파 '저항벨트'의 후견인 이란을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시한폭탄으로 취급했다. 평화 공존을 믿고 애써온 이스라엘의 온건파들은 집단 트라우마 속에서 입을 닫았고, 제한된 생존 공간을 둘러싼 생존투쟁만이 정당화됐다.

안보 불안과 생존권 확보란 명분 속에 두 당사자는 서로를 향한 타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각자의 상처와 피해의 트라우마를 내세우며 가해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폭력의 확대재생산을 가속화하고 있다. 하마스 전쟁 2년. 팔레스타인인 7만명이 죽었다. 레바논에선 1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유대교 극보수 종파 하레디는 목소리를 키우며, 유대교의 서사를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훼손시켰다. "신정국가 이란을 닮아간다"는 우려와 비아냥도 나왔다. 이들과 손잡은 네타냐후의 야심과 사법 리스크도 극단적 선택을 재촉했다.

살던 땅에서 밀려나 인구 1100만명 가운데 60%가 난민으로 떠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박해를 피해 중동으로 몰려와 1949년 국가를 세운 유대인들. 그들 사이에 어떤 타협점과 화해의 레시피도 보이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해방과 이스라엘 파괴를 국시로 삼은 이란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흑백을 나누기 어려운 회색지대, 그레이존을 만든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고, 뒤엉키면서 윤리도덕을 무력화시키는 절박한 존재의 한계상황을 드러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선제 공격이, 자국민 수만명을 시위현장에서 쏴 죽인 도그마에 사로잡힌 신정체제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생존과 안보불안을 명분으로 한 네타냐후의 폭주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류학자 이희수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번 공격은 국내적으로 명분을 잃고 휘청거리던 이란의 신정체제를 연명시켰다면서 양측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지적했다.

전쟁이 가져온 파장은 글로벌 경제를 뒤흔들었고, 우리에게 대외의존 경제의 더 커진 취약성에 대한 보다 장기적인 보완책 마련을 주문했다.
또 경제를 떠받쳐온 안보환경을 다시 살피게 했다. 회색지대의 암초들을 무탈하게 넘어가려면 균형감을 발휘하며 항해를 방해할 돌발 변수들에 대비해야 한다. 저물어가는 일극 패권시대를 알리는 전조들 속에서, 더 거칠어진 주변 강대국들의 줄세우기 속에서, 자존을 위해서도 이란전쟁은 우리에게 준비하고 풀어나가야 할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jun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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