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도 수없이 고친 한줄... 글쓰기 흔적 들여다본다
파이낸셜뉴스
2026.04.17 04:00
수정 : 2026.04.17 04:00기사원문
'한국 근현대 문학인의 육필원고'展
교보아트스페이스서 6월 14일까지
지우고 다시 써내는 과정 고스란히
25년 집필 박경리 '토지' 자료 눈길
작가의 방·독자의 책상 체험 공간도
"완벽한 문장이 태어나는 순간 경험"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는 과정 속에서 문장은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문장의 시간'을 드러내는 전시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리고 있다. 교보아트스페이스는 기획전 '문장이 태어나는 순간_한국 근현대문학인의 육필원고'를 오는 6월 14일까지 진행한다.
육필 원고에는 삭제된 문장과 덧붙여진 표현, 여백에 남겨진 메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문장이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가가 어떤 고민과 선택을 거쳐 글을 다듬었는지를 드러낸다.
참여 작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국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왔다. 김유정은 농촌 현실 속에서도 해학과 생동감을 살린 서사를 구축했고, 이상은 문장 구조를 해체하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염상섭은 시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했으며, 이효석은 서정적 문체로 한국적 감각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박경리는 오랜 시간에 걸친 집필을 통해 대하소설 '토지'를 완성하며 문학의 깊이를 확장했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방'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원고와 메모, 교정 흔적은 창작이 특정한 순간의 영감이 아닌 반복과 축적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작품은 한 줄의 문장이 아닌, 그 문장을 만들기 위해 쌓인 시간의 총합이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박경리의 '토지' 원고는 전시의 핵심 자료로 꼽힌다. 25년에 걸친 집필 과정 속에서 남겨진 수정과 덧쓰기 흔적은 방대한 서사가 어떻게 다듬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창작의 밀도가 원고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염상섭의 '취우' 구상 메모는 작품이 시작되기 전 단계의 설계 과정을 보여준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정리된 기록을 통해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어 '난류' 육필 원고에서는 문장을 다듬는 과정이 드러나며 '숙명의 여인' 스크랩 자료에서는 발표 이후에도 이어지는 수정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유고 노트는 발표되지 않은 글이 담긴 기록으로, 작가의 사고와 언어가 자유롭게 남아 있는 자료다. 한자와 일본어가 혼용된 표기와 자필 서명은 창작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김유정의 '동백꽃' 초판본은 작품의 유통과 변화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기의 판본을 통해 동일한 작품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전달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독자의 책상'에서는 문장을 따라 써보는 체험이 가능하다. 눈으로 읽을 때와는 다른 리듬과 호흡을 느끼며 문장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오늘날, 육필 원고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손으로 남긴 기록에는 작가의 시간과 선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은 창작의 본질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문학을 완성된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익숙하게 읽어온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다시 만나게 하며, 문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해를 확장한다.
교보 아트스페이스 측은 "완벽한 문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반복된 수정과 선택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며 "이번 기획전은 그 과정을 따라가며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익숙한 문장을 낯설게 다시 읽고, 문장이 태어나는 순간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고 평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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