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잘못입니다"라고 사과했더니… AI는 통하고, 사람은 망했다?
파이낸셜뉴스
2026.04.17 05:56
수정 : 2026.04.17 05:56기사원문
<28>이화여대 김은실 교수팀
도덕적 문제냐 단순 오류냐가 관건
462명의 데이터로 증명한 사과의 기술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사람은 도덕성, AI는 정확성을 기대한다
이 발견은 기업의 고객 응대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요즘 많은 기업이 인간 상담원과 AI 챗봇을 함께 쓴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실수가 발생했을 때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업은 누가 사과하든 비슷한 문구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그런 방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과의 주체와 문제의 성격을 먼저 따져야 한다. 차별이나 무례함 같은 도덕적 문제인지, 단순한 시스템 결함인지에 따라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 여기에 사과하는 주인공까지 맞물려야 비로소 고객의 마음이 움직인다.
■222명의 실험으로 확인한 '기대의 차이'
연구팀은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정밀 실험을 진행했다. 첫 번째 실험에는 총 222명이 참여했다. 연구팀은 온라인 쇼핑 상황을 가정해 두 가지 사고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한쪽은 "여성은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드러낸 추천 서비스였다. 이는 명백한 도덕적 문제다. 다른 한쪽은 고객의 요구와 전혀 상관없는 상품을 추천한 단순 성능 오류였다. 이 상황에서 인간 상담원과 AI 챗봇이 각각 사과하게 한 뒤 반응을 살폈다.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도덕적인 문제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인간 상담원에게 훨씬 더 차가운 매를 들었다.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높은 도덕적 기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순한 기능 오류가 났을 때는 AI 챗봇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AI에게는 무엇보다 기술적인 정확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즉 고객이 누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실망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숫자로 증명됐다.
■사과의 정석을 뒤집은 240명의 응답
이어 진행된 두 번째 실험에는 240명이 참여했다. 이번에는 사과하는 방식에 따른 신뢰 회복의 차이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사과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눴다.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는 내부 책임 방식과, 외부 시스템이나 상황 탓으로 돌리는 상황 설명 방식이다.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도덕적 문제 상황에서 인간 상담원은 "제 잘못입니다"라고 솔직하게 고개를 숙일 때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AI 챗봇이 똑같이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자 반응은 싸늘했다. AI는 오히려 "시스템의 기술적 한계 때문입니다"라고 상황을 설명할 때 고객의 신뢰를 더 잘 회복했다.
단순한 기능 오류 상황에서는 이 결과가 다시 한번 뒤집혔다. 기술력이 생명인 AI는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할 때 신뢰가 더 빨리 돌아왔다. 반대로 인간 상담원은 기술적 오류에 대해 외부 상황을 탓하며 설명할 때 고객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같은 사과라도 누가 말하느냐와 어떤 상황이냐가 어긋나면 효과는 뚝 떨어진다. 반면 이 조합이 딱 맞아떨어지면 고객의 화는 마법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사과도 '설계'해야 하는 시대
이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과는 단순히 미안하다고 말하는 행위가 아니다. 누가 말하는가, 어떤 상황인가, 어떻게 설명하는가라는 세 가지 요소가 정교하게 맞물려야 하는 설계의 영역이다.
김은실 교수는 "인간 직원이 개입하는 서비스에서는 진정성과 윤리적 책임을 강조해야 고객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반면 AI를 사용할 때는 무조건적인 사과보다 오류의 원인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기업의 사과는 직관이나 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사과는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연구는 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인간 행동 속 컴퓨터' 6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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